택재(澤齋)  창립(昌立) |
자는 탁이(卓爾) 호는 택재(澤齋)이다. 택재라는 호는 김창립이 셋째 형인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중택재(重澤齋)라는 서실을 짓고 독서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증조부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광찬(金光燦)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으로 여섯 째 아들이다. 김수항은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자질이 뛰어나 세간에서 소위 육창(六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처럼 김창립은 당대에 손꼽히는 문벌이었던 안동김씨 가문이라는 명문을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질이 나타나 기재(奇才)로 불렸으며 특히 시를 잘 썼으나 병으로 18세에 요절하였다. 그는 15세에 발분하여 문장과 학문에 크게 힘을 썼다. 나이 16세에 민정중(閔鼎重)이 관례(冠禮)를 주관하면서 자(字)를 탁이(卓而)로 지어 주었고 17세에 이민서(李敏敍)가 딸을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았다. 1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1683년에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였는데 마침 명성황후의 장례에 참석하였다가 감염되었다. 이 병으로 인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니 같은 해 12월 26일이었다. 김창립은 셋째 형인 김창흡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는데 김창흡은 당시 조선 시단의 구태의연한 면모를 일신하여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기 위해 노력한 시인으로서 당대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김창립은 시를 배움에 있어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과는 약간의 구별되는 성향이 있었다. 택재유타(澤齋遺唾)의 부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그의 뜻이 과거에 응시하여 명성과 이익을 취하는데 있을 뿐만이 아니었다. 읽은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시경에 힘을 쓴 것이 가장 전일하여 항상 외우고 감상하였으며 초사(楚辭)나 사마천의 사기 고악부(古樂府) 당나라의 여러 시를 탐독하고 여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말에서 나오는 것이나 글로 지어진 것이 절대로 세속의 틀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러한 김창립의 뜻밖의 죽음은 가족과 주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가문의 배경이나 개인적 능력을 고려해 볼 때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죽음으로 인해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실망감이 문집의 발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 7년째에 기사년(己巳年)의 화(禍)가 일어났다. ‘기사년의 화’는 숙종 15년인 기사년(1689)에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장희빈)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화를 당한 날에 선친(김수항)이 김창흡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우 무덤에 내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으려고 한 지 오래 되었으나 너무나 슬퍼서 글을 짓지 못하였다. 지금은 내가 어쩔 수 없으니 네가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았으나 슬픔이 심하여 글을 지을 수 없었다. 그 뒤 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지었다. “아우(김창립)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총명하며 준수하고 명랑하여 어려서부터 예지가 뛰어났다. 어려서 여러 형들을 따라 공부하면서 이미 ⌈시경⌋의 국풍(國風)과 대아(大雅) 소아(小雅)의 원류(源流)를 들어보고 고금 성률(聲律)의 높낮음에 대해 취사선택할 줄을 알았는데 이해력이 풍부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이에 평소 좋아하는 잡기(雜技)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문장에다 힘을 쏟았는데 이미 형들인 김창협과 김창흡 등을 스승으로 삼아 마을의 동지 5-6명을 인솔하여 주야로 어울려 서로 갈고 닦는 것을 일삼았다. ⌈시경⌋․⌈초사(楚辭)⌋․⌈문선(文選)⌋과 옛날 악부(樂府)로부터 당나라 중기 여러 학자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고 심취하여 시가(詩歌)로 발로되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여 매양 읽다가 경경(慶卿)과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타며 슬프게 노래하는 대목에 이르면 대뜸 탄식하고 강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기에서 경경은 형가(荊軻)이다. ⌈사기⌋에 “고점리는 축(筑)을 잘 탔는데 형가와 친구였다. 형가가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러 길을 떠나자 연(燕)나라 태자 단(丹) 등이 역수(易水)에 나와 전별하였는데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는 진시황을 저격하였다가 미수에 그쳐 죽었고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진시황이 고점리를 잡아다 눈을 빼고 곁에 두고 축을 타게 하였다. 고점리가 축 속에다 칼을 넣어 두었다가 틈을 타 진시황을 찔렀으나 맞지 않아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같이 날마다 술을 마시고 이소(離騷: 옛 초나라 굴원(屈原)의 서정시)나 읊조리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뜻은 세상의 부귀공명을 하찮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간혹 태학(太學)에 나가 노닐면서 누차 과시(課試)에 합격하였으나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는 선량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사람과는 신의가 있었으며 특히 친구 간에 독실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노니는 자들은 너나없이 진심으로 사모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 동기간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상복(喪服)을 입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정월에 아우가 벽에다 큰 글씨로 ‘나의 나이 18세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스스로 격려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해 12월 26일에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동지들이 상자 속에서 글 수십 편을 찾아내어 김창흡의 산정(刪定)을 거치고 나서 그가 강습한 서실의 이름을 따라 택재유타(澤齋遺唾)로 이름을 붙였다. 그의 묘소는 석실(石室) 선영에서 몇 리 떨어진 양주(楊州) 율북리(栗北里)에 있는데 동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 |
택재유타(澤齋遺唾)조선 시대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 1666~1683)의 문집이다. 본집은 우인들이 유시를 수집하여 저자의 숙형 창흡(昌翕)의 산정을 받아 1684년 활자로 초간한 후 백형 창집(昌集)이 묘지명 등을 추가하여 강화 유수로 재직 중이던 1700년 강화에서 홍유인(洪有人)의 《칩와유고(蟄窩遺稿)》와 함께 운각활자로 인행한 중간본이다. 본집은 불분권 1책으로 시와 부록으로만 되어 있다. 권수에 김석주(金錫胄)가 1684년에 지은 서(序)가 있다. 시(詩)는 시체 구분 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오언시가 주류를 이룬다. 김창협은 저자의 시가 맑고 유연하고 호탕하며 격조가 높으면서도 정취가 풍부하다고 평하였다. 작품 중 〈야등국사암(夜登國師巖)〉은 부친의 유배지에서 지은 시로 10세 때 도선(道詵) 국사의 탄생 설화가 있는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에서 지은 것이고 〈철원(鐵原)〉은 궁예의 옛 성터를 바라보며 회고한 것이다. 부록에는 행장 묘표 묘지명 전(傳) 애장이 실려 있다. 권말에는 1684년에 김수항 김창흡 등이 지은 발과 지은 연도가 표기되지 않은 김만중(金萬重)의 발이 있으며 간기(刊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