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정랑(禮曹正郞)  진원(震遠)


자는 덕이(德以) 호는 학록(鶴麓). 아버지는 김계종(金繼宗)으로 김태(金兌)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충의위 장여익(張汝翊)의 딸 인동 장씨(仁同 張氏)이다.

김진원(金震遠)[1601~1653]은 1601년(선조 34) 안동 예안면 서촌리(書(西)村里)에서 출생하였다. 1609년(광해군 1) 9세 되던 해에 구담리에 사는 김태(金兌)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주했다. 1637년(인조 15) 삼종숙(三從叔)되는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639년(인조 17)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주사가 되었다. 1643년(인조 21) 오수도(獒樹道) 찰방(察訪)에 제수되어 근무하던 중 풀이 죽는 폐해를 해결한 공으로 역민(驛民)들에 의해 비(碑)가 세워졌다.

이후 전적(典籍)을 거쳐 1645년까지 예조 좌랑 병조 좌랑 예조 정랑을 지냈다. 1644년 병조 좌랑으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1646년에 영국공신 원종 1등에 제수되었다.

1649년)에는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를 1651년(효종 2)에는 공조 정랑(工曹 正郞) 연서도(延曙道) 찰방(察訪)을 지냈다. 연서도는 칙사(勅使)들이 다니는 길이기에 이들을 영접하는 일로 백성과 말이 잔패(殘敗)한 실정이었는데 이들을 잘 다스려 수개월 만에 정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652년(효종 3) 봄에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개성 경력(開城 經歷)에 제수되어 폐단을 정리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1637년(인조 15) 김상헌(金尙憲)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종후손(從後孫)인 김병현(金炳玹) 김병선(金炳璇) 등이 1938년 김진원의 망실된 글을 모아 김진원의 아버지 김태의 유묵(遺墨)과 합쳐 무인(戊寅)년(1878)에 『수월 학록 양선생 유고(水月 鶴麓 兩先生 遺稿)』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바로 간행하지 못하고 후대에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되었다.

묘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 있다.

1646년 영국공신 원종 1등(寧國功臣 原從 一等)에 제수되었으며 사망 후 3년이 지난 1656년(효종 7)에는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639..인조 17년문과(文科)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2/16)

1641.07.14인조 19년가주서(假注書)
1643.03.06인조 21년오수찰방(獒樹察訪)
1646.02.02인조 24년전적(典籍)
1646.09.09인조 24년병조좌랑(兵曹佐郞)
1647.04.03인조 25년예조좌랑(禮曹佐郞)
1647.04.12인조 25년안주판관(安州判官)
1648.12.20인조 26년홍청도사(洪淸都事)
1652.09.04효종 3년개성경력(開城經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