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는 1837년 영돈녕부사 김문근(金汶根)과 이조판서 민무현(閔懋鉉)의 딸 흥양부부인(興陽府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한양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초간택에 오르기 며칠 전부터 날마다 상서로운 무지개가 집앞에 보이더니 물을 담은 대야가 광채속에 잠겨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1851년(철종 2) 15살에 왕비에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858년 원자 이융준(李隆俊)을 낳았으나 곧 죽었다.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1878년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863년 명순(明純)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66년(고종 3) 휘성(徽聖)에 이어 정원(正元) 1873년에는 다시 수령(粹寧)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시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이고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西三陵)내에 있다.









묘지문(墓誌文)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우리 철종 대왕비(哲宗大王妃)께서 병으로 편치 않다가 무인년(1878) 5월 12일 인시(寅時)에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춘추는 42세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엄숙한 여막에서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신은 대비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지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어 친히 지은 행록(行錄)을 내려 보냈으니@ 다음과 같았다.



‘대비께서는 정유년(1837) 3월 23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의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공순히 받들었는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병이 있으면 걱정하는 표정이 매우 불안하였고 병이 회복되면 처음과 같았다. 동기를 사랑하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어른을 섬기는 예절을 게을리 하지 않고 능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침묵하며 말이 적었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덕과 도량이 일찍 성숙하여 근엄하기가 마치 어른 같았고 내외의 친척들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해년(1851)의 초간택(初揀擇) 전 며칠 동안 상서로운 무지개가 연달아 대청 앞 물 항아리에 보이고 온 마을을 한 광채가 가로지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삼간택(三揀擇) 후에는 별궁(別宮)에서 거처하였는데 규례대로 《소학(小學)》을 받아서 한 번 문장의 뜻을 해석하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 거침없어서 막히는 데가 없었다. 몇 달이 못 되어 문리(文理)가 크게 통하였으나 오히려 만족하지 못한 듯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이미 혼례를 치른 후에는 행동거지가 법도가 있었고 주선하는 바가 규례에 맞았다. 편안하고 자상하며 온순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안으로 간직되고 겉으로 드러나 상서롭고 화순한 기운이 온종일 궁중에 넘쳤다.



우리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섬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헤아려 살피고 뜻에 맞는 물품을 모두 갖추어 드렸다. 아침과 저녁으로 정성(定省)을 다한 외에도 궁녀(宮女)를 시켜 때때로 안부를 살핀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만년에 성모의 몸이 이따금 편치 않으면 몹시 걱정하면서 항상 좌우에서 모시며 조섭하고 부축하였으며 곁의 사람들에게 모시도록 맡기지 않았다. 성모께서 그의 수고를 측은히 여겨 잠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여도 끝내 물러가서 휴식하지 않았다. 정사년(1857)에 가슴 아픈 순원 성모의 초상이 나자 곡하고 울며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쳐다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하루같이 극진히 추모하였으니@ 하늘이 내린 효성으로 모두 감복하였다.



순원 성모의 초상을 마친 뒤에는 우리 태모(太母)를 섬기는 일을 성모 섬기듯 하였다. 매사를 반드시 아뢰어 시행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가르쳐 이끌어주고 돌보며 사랑해주는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지난가을 태모께서 편치 않았는데 그때 그도 몸이 편안치 않았으나 오히려 매일 문안하였다. 태모께서 병이 더할까봐 걱정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 그만두게 하니 잠자는 것도 잊고 밥상을 드려도 맛을 모를 지경이었다. 문안하는 궁녀들이 서로 이어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아뢰니@ 기뻐하면서 경축하는 마음이 얼굴과 맘에 넘쳤으니 그의 돈독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계해년(1863)에 큰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여 몸이 여윔이 예를 넘어섰다. 그때 날씨가 추웠지만 오히려 날마다 찬궁(攢宮)에 가서 현궁(玄宮)을 봉심(奉審)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의대(衣襨)를 풀지 않으면서 3년상을 마치었다. 이로부터 한여름이 되었으나 부채질을 하여 더위를 쫓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자리에 눕지 않았으며 일이 없으면 혹시라도 뜰에 나가지 않았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항상 보았는데 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효자편(孝子編)〉을 읽다가 문득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으니@ 대개 순원 성모를 7년밖에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지극히 원통해하며 스스로 마음이 상하여 금하지 못하고 그랬던 것이다. 매번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기일에 앞서 소복(素服) 차림을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오르는 반찬 중에 혹시라도 고깃국물이 섞였을까 걱정하여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수라를 드실 때에는 채소만 들었다. 제삿날 밤이 되면 새벽이 되도록 촛불을 켜놓고 있다가 철향(徹享)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친정 부모의 기제사를 당해서도 그러하였다.



옷은 비단을 입지 않았고 다만 겨울에는 무명옷을 여름에는 모시옷을 항상 입었는데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덕은 자못 옛날의 왕비들에게도 없었던 일이었다.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사당의 은제기(銀祭器)가 일찍이 없어졌을 때 조사하게 되면 혹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걸려들지 않을까 걱정하여 급히 명하여 그만두게 하고 같은 모양으로 제기를 만들어 보냈으니 이것으로도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덕을 볼 수 있다. 선왕의 궁인(宮人)으로 은총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을 돌보아주어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밑에까지 미치는 덕에 육궁(六宮)이 모두 칭송하였다. 영혜 옹주(永惠翁主)에 대해서는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혼례를 치르자 배나 스스로 기뻐하였고 항상 병에 잘 걸리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다.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하였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해하였다. 궁인으로서 나이 많은 사람은 잘 돌봐주었고 나이 어린 사람은 사랑해 주었으며 매번 선물을 주고 한결같이 대해 주었기 때문에 모두 은덕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혹시 남을 헐뜯는 사람이 있으면 잠자코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기 때문에 말했던 자가 황송해서 다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승하하기 하루 전에도 오히려 직접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였으며 비록 본 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속옷 차림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전(各殿)이 왔을 때에는 부축하여 일어나서 맞이하고 공경스럽게 대하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11일 한밤중에 우레 소리가 일자 증세가 갑자기 더하였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기를@ 「우레 소리가 왜 저렇게 큰가?」라고 하였다. 12일 새벽이 되자 우레 소리가 더욱 요란해지면서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이 갑자기 빛을 잃었는데 이것은 하늘이 암시한 징조가 아니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생각건대 우리 성후(聖后)의 높은 덕과 지극한 행실을 어떻게 창졸간에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략 평시에 전해들은 것과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삼가 만 분의 하나를 적은 것이다.’



신은 삼가 읽은 뒤 손을 모아 쥐고 머리를 숙여 말한다.



아아! 성대하다. 신이 어떻게 감히 빼고 더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신이 그전에 대궐에 있을 때 안부를 물으니 후비께서 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양전(兩殿)께서 늘 나에게 대해 주시기를 일마다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 마음은 몹시 기쁘다.’라고 하셨다. 갑술년(1874) 큰 경사 때 후비께서는 흔연히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명철한 사람을 세자로 맞아 온 나라를 밝게 비치니 억만 년을 무궁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라의 터전은 우리 열조(列祖)께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돌보아주시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또한 우리 성상의 어진 덕이 하늘에서 밝은 세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훌륭하다! 신이 어찌 감히 여기에 기록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신에게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는 것은 신하로서 매우 영예롭고 중요한 자리이다. 형과 동생이 의정부(議政府)에서 다투어 명예를 차지하게 되어 우리 가문은 지나친 데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자리에 있든 마땅히 이 말을 명심하라.’고 두세 번 거듭 타일렀는데@ 삼가 바라보니 조심하고 두려운 기색이었다. 그러니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사적인 일이라고 해서 빼버리고 여기에 기재하지 않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신은 생각건대@ 효라는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일찍이 이르기를@ ‘행실은 여기에 달려있다.’라고 하였고 글로 써서 경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지극한 지경에 이르면 귀신과도 통하고 사해를 빛내게 된다. 아@ 그 위대함이여! 왕후가 그것에 극진하였다.



공경이라는 것은 한마음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지극하도다@ 왕후여! 지극히 유순하면서 강직하고 지극히 조용하면서 떳떳하였다. 왕비로 있으면서 공순하게 임금을 받들며 자기 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고 마음이 독실하였으니@ 우리 왕후가 바로 그러하였다. 어진 마음은 모든 착한 것의 으뜸으로@ 인자하고 선량하고 공경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나타나 보일 때에는 측은한 생각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벌레처럼 변변치 않게 보이지만 어미가 자식을 기르듯 품어 기르는 가운데 자라지 않음이 없어 확대되고 충실해져 마치 불길이 타오르거나 샘줄기가 뻗어 올라가듯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 그 광대함이여! 왕후의 행실이 검소하여 백성 교화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미 부유하고 이미 귀한 처지에서도 오히려 그런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관(蠶館)에서 실을 뽑다가 옷을 더럽히게 되면 아랫사람들의 옷을 얻어 입기까지 하였으니@ 아@ 고상하다! 왕후가 그렇게 하였다.



신이 감히 역사에서 칭송한 바를 상고하건대@ 중국 한(漢) 나라의 명덕 마황후(明德馬皇后)는 허름한 천으로 옷을 지어입고 푸른 겉옷을 몸에 걸치고 집안을 경계하였으니@ 그 검소함으로 수신제가하였다. 또 화희 등황후(和熹鄧皇后)는 많은 음식을 차려놓는 것을 경계하였고 풀을 뜯어먹게 된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의 음식상을 걷어 내주어 굶주린 무리들을 구원하였으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였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의 황후 태목(太穆)은 옷을 벗을 틈이 없이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기를 좋아하였고@ 태종(太宗) 때 문덕 황후(文德皇后)는 예의를 숭상하고 《여칙(女則)》을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을 스스로 거울삼았으니@ 모두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러나 네 가지의 덕성 중에서 각기 한 가지를 칭송하였으니. 만약 이상의 네 가지 덕성을 겸비한다면 모든 좋은 점이 구비되는 것이다. 여자 중에 이것을 모두 갖추어 이룩한 인물은 오직 삼대(三代) 이상이라야 아마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皇帝)의 아내라든가 당요(唐堯)의 어머니라든가 그런 여인들은 훌륭했지만 경서(經書)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주 소략하였다. 삼가 우순(虞舜) 이후부터 주(周) 나라 시대까지 상고해보면 우순(禹舜)의 배필인 당요(唐堯)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총명하고 절개 있는 점에서 본보기가 되었고@ 하우(夏禹)의 배필인 도산씨(塗山氏)는 의리에 통달하고 공훈이 있어 뛰어났다. 은탕(殷湯)의 배필인 유신씨의 가르침으로 순위가 올바르게 되었고@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의 단정함으로 전일하고 성실하면서 엄정하였다. 주 문왕(周文王)의 배필인 태사(太姒)로 말하면 모든 덕을 겸비한 동시에 부녀자의 도리도 다하였기 때문에 《모시(毛詩)》의 〈권이(卷耳〉·심관〈審官〉·교목〈樛木〉등의 노래에 실려 있다.



우리 왕후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태사이다. 이미 하늘이 내려 준 덕이 있었고 정일한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임금의 배필이 되어서 왕실의 계통을 이었다. 만물을 마땅하게 다스리려면 그 몸을 잘 보살펴 그 수명을 길게 해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공사(公私) 간에 언짢은 일을 당하게 하여 건강이 나빠져서 중신(中身)의 나이를 누리지 못하고@ 어쩌자고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은 지극한 슬픔을 당하게 만들었는가? 어찌 이른바 귀신의 일이란 밝히기 어렵고 세상의 이치란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 그런 것인가?



아아! 원통하다. 왕후는 신해년(1851)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무오년(1858)에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계해년(1863)에 여러 신하들이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대비(大妃)라는 칭호를 올렸다. 3년 병인년(1866)에는 휘성(徽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정원(正元)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10년 계유년(1873)에 수녕(粹寧)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고@ 이때에 와서 철인(哲仁)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휘호(徽號)는 경헌 장목(敬獻莊穆)이고 전호(殿號)는 효휘(孝徽)이다. 산릉(山陵)은 예릉(睿陵)과 같은 언덕에 정하고 초하루가 정미일(丁未日)인 9월 18일 갑자일(甲子日)에 왼쪽에 부장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면 평상시 매우 가까이하던 뜻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차마 이 일을 하면서 구구한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그 지극한 슬픔을 막아보려고 하였으나@ 28년 동안의 숨은 노력과 너그러운 교화를 신의 변변치 못한 글재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지어 내려주신 글을 공경히 받들어 첫머리에 제시하였다.



아아! 백대토록 내려가도 여기에서 장차 교훈을 찾을 것이니@ 아아! 아름답다@ 아아! 원통하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지었다.】



교명문(敎命文)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丁丑/御仁政殿@ 行冊妃禮@ 敎命文曰:



&乾坤合德@ 萬品資覆載之功@ 日月儷明@ 八表宣臨照之化。 故帝王之出治@ 繇配匹而造端。 十亂臣婦人與焉@ 良佐是賴@ 一正家天下定矣@ 哲辟所先。 予惟殷武丁舊勞@ 玆有周沖子丕責。 撫五百年綿籙@ 天必欲全安@ 匝三千里洪區@ 國不是褊小。 永念負荷之至重@ 特須內外之相成。 願爲之有室家@ 思服也切@ 可與共承宗廟@ 望助者深。 廼旁求於高門@ 遂歷選於碩媛。 咨爾金氏喬木毓秀@ 曾沙呈符。 四世名義之宗@ 上溯文正公大節@ 東朝親懿之近@ 中與孝顯后同房。 蓋其善慶攸基@ 鍾幽閑貞靜之況復詩禮所襲@ 著溫惠淑愼之儀@ 稽卜筮而允臧@ 詢陬澨而普悅。 備六禮重宜正褕翟之尊@ 迓百福原@ 實叶軒龍之瑞。 玆涓吉備儀@ 冊封爲王妃@ 爾其懋昭嘉聞@ 弘敷陰敎。 相嚴禋則殫祗栗之誠@ 問寢膳則盡怡愉之度。 一德靡懈@ 佇聞鷄鳴之箴@ 萬祿是遒@ 必致麟趾之應。 於戲! 惟孝敬可以範@ 俗惟謙沖可以受祺。 惟陰陽交須@ 民物咸濟惟朝夕克謹@ 天休鼎臻。 誕履黃裳元吉之隆@ 永膺朱芾斯皇之慶。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趙斗淳製】



건곤(乾坤)이 덕(德)을 합쳤으니 만물이 복재(覆載)하는 공(功)을 힘입었고@ 일월(日月)이 나란히 빛났으니 팔표(八表)에 왕화(王化)가 밝게 비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왕(帝王)이 나와 다스리는 데는 배필(配匹)을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변란(變亂)을〉 다스리는 신하 10인 가운데 부인(婦人)도 들어 있으니 어진 보좌(輔佐)를 힘입었고@ 한결같이 집안을 바로잡아야 천하가 안정되었으니 어진 임금의 급선무가 된다. 나는 오직 은(殷)나라 무정(武丁) 같은 옛 업적을 이어받았으니@ 주(周)나라 충자(冲子)의 큰 책임을 담당하였다. 5백 년 이어온 부명(符命)을 어루만지니 하늘이 반드시 편안히 보전해 줄 것이며@ 3천 리 넓은 구역(區域)이 둘렸으니@ 편소(褊小)한 나라가 아니로다. 길이 짊어진 무거운 책임을 생각하면@ 특히 내외(內外)가 함께 이루어 주기를 기다린다. 실가(室家) 두기를 원했으니 생각함이 간절하였고@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었으니@ 내조(內助)를 바람이 깊었다. 이에 훌륭한 집안에서 널리 구하였고@ 드디어 석원(碩媛)을 두루 간택하였다. 아! 그대 김씨(金氏)는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집에서 단정히 자라@ 증사(曾沙)의 부서(符瑞)가 나타났다. 4세(世)의 명의(名義)를 주도(主導)하여 위로는 문정공(文正公)의 대절(大節)을 본받았고@ 동조(東朝)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중(中)으로는 효현후(孝顯后)와 한 집안이다. 대개 선경(善慶)의 터전에서 자라나 유한(幽閑) 정정(貞靜)의 성품을 갖추었고@ 게다가 시례(詩禮)를 이어받아 온혜(溫惠)·숙신(淑愼)의 의표(儀表)가 드러났다. 복서(卜筮)를 헤아려 보매 진실로 아름다웠고@ 외진 곳에 가서 물어 보아도 다 기뻐하였다. 중대한 육례(六禮)를 갖추어 존귀한 왕비(王妃)를 삼기에 마땅하고@ 백가지 복의 근원을 맞이했으니 실로 헌룡(軒龍)의 상서(祥瑞)와 부합되었다. 이에 연길(涓吉)의 의례를 갖추어 왕비에 책봉한다.



그대는 아름다운 명성을 빛내기에 힘쓰고@ 음교(陰敎)를 널리 펴도록 하라. 엄숙한 제사를 받들어서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정성을 다하고@ 침선(寢膳)을 물을 때는 온화한 모습을 간직하였다. 한 가지 덕(德)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계명(鷄鳴)의 잠계(箴戒)를 들려주기를 기다리고@ 만가지 복록(福祿)이 모아졌으니 반드시 인지(麟趾)의 응험이 이를 것이다. 아! 오직 효경(孝敬)이 세속의 모범이 되고@ 겸충(謙冲)만이 복을 받게 된다. 음양(陰陽)이 조화되니 백성과 만물(萬物)이 모두 성취되고@ 조석으로 부지런하면 하늘의 복록이 성대히 이를 것이다. 크게 황상 원길(黃裳元吉)의 융성함을 실천하니@ 길이 주불 사황(朱芾斯皇)의 경사를 행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들 알지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조두순(趙斗淳)이 지었다.】



옥책문(玉冊文)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關雎基王道@ 周化所以御家邦@ 坤象協乾元@ 羲繇所以正外內。 肆賢佐之媲德@ 卽人倫之造端。 式稽彝章@ 載宣顯冊。 咨爾金氏@ 忠良華冑@ 詩禮名門。 俔妹之令聞夙彰@ 聖母之徽音思纉。 端莊惠愼@ 柔嘉懿恭。 寤寐好逑@ 天作合於初載@ 揀掄淑德@ 位宜正於長秋。 玆膺儷極之尊@ 遂擧造舟之禮。 珩珮配九章之服@ 陰功有資@ 蘋蘩主亞薦之儀@ 邦典克備。 龜筮云吉@ 詢議叶於僉從@ 翟褕斯皇@ 物采昭於崇飾。 百福之原攸始@ 二曜之明齊輝。 玆遣使臣領中樞府事鄭元容@ 行龍驤衛大護軍徐左輔@ 持節備禮@ 冊命爲王。 妃於戲! 惟勤儉以臨壼闈@ 惟孝敬以奉訓則。 鷄鳴佩警@ 懋內助於萬幾@ 螽羽綿禧@ 裕後昆於千億。 尙芳猷之咸頌@ 誕景祿之永綏。 故玆敎示@ 想宜知悉。 【知中樞府事徐箕淳製】



관저(關睢)가 왕도(王道)의 터전이 되었으니 주남(周南)의 교화가 집안과 나라를 다스렸고@ 곤상(坤象)이 건원(乾元)에 화협하였으니 주역[羲經]의 점괘에 내외(內外)를 바로잡았다. 이에 어진 보좌(輔佐)의 아름다운 덕은 바로 인륜(人倫)의 시작이다. 이에 이장(彝章)을 상고하여 곧 옥책문(玉冊文)을 선포한다. 그대 김씨는 충량(忠良)한 화벌(華閥)의 후예요@ 시례(詩禮)의 세가(世家) 명문(名門)이다. 견매(俔妹)의 아름다운 명성이 일찍이 드러났고@ 성모(聖母)의 휘음(徽音)을 계승하기를 생각하였다. 단아(端雅)하고 근신(謹愼)하며@ 유순하고 온공(溫恭)하였다. 자나깨나 좋은 짝을 구하였는데 하늘이 즉위(卽位)의 초두에 짝을 맺어 주었고@ 숙덕(淑德)을 간택하여 장추전(長秋殿)에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였다. 이에 지극히 존엄함에 짝하게 되어 마침내 주량(舟梁)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형패(珩珮)는 구장복(九粧服)에 어울렸으니@ 음공(陰功)이 바탕이 되었고@ 빈번(蘋蘩)으로써 아천(亞薦)의 의식(儀式)을 주장했으니 방전(邦典)을 갖추었다. 귀서(龜筮)가 길(吉)하다 하니@ 여러 사람의 순의(詢議)도 찬동(贊同)하였고@ 적유(翟褕)가 빛나니 물채(物采)는 아름다운 수식(修飾)에 밝았다. 백복(百福)의 근원이 이에 시작되었고@ 이요(二曜)는 일제히 빛을 발하였다. 이에 사신(使臣)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과 행 용양위 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서좌보(徐左輔)를 보내어 절(節)을 지니고 예(禮)를 갖추어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곤위(壼闈)에 임하고@ 효경(孝敬)으로 가르침을 받들게 하라. 계명장(鷄鳴章)의 경계를 마음에 새겼으니@ 만기(萬機)의 내조(內助)에 힘썼고@ 자손(子孫)이 번성하여 후예(後裔)가 천억(千億)으로 늘어나리로다. 방유(芳猷)를 모두가 송축하니@ 큰 복록(福祿)이 길이 편안할 것이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들 알지어다.



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서기순(徐箕淳)이 지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851.08.24철종 2년왕후대왕 대비전에서 대혼(大婚)을 김문근(金汶根) 집에 정하라고 명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생(生)1837년 정유(丁酉) 陽4월 27일
 1837년(헌종 3) 한양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초간택에 오르기
  며칠 전부터 날마다 상서로운 무지개가 집 앞에서 보이더니 물을 담은 대
 야가 광채 속에 잠겨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185
 1년(철종 2) 왕비에 책봉되었고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철인왕후는 비록 안동 김씨 일문에서 나온 왕비였지만 친정을 두둔하지 않
 았고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았다. 철인왕후는 말 수가 적고 쉽게 내면을 드
 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1878년(고종 15) 5월 창경궁 양화
 당에서 죽었다.
졸(卒)1878년 무인(戊寅) 陽6월 12일
묘(墓)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예릉
부(夫)전주(全州)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子융준(隆俊)
21 세22 세23 세24 세25 세
이장(履長)복순(復淳)영근(泳根)병준(炳駿)문규(文圭)
완규(完圭)
최규(㝡圭)
박제현(朴齊賢)
이종칠(李鍾七)
병기(炳冀)
병여(炳驪)우규(雨圭)
낙규(洛圭)
홍우남(洪祐南)
병황(炳䮲)명규(命圭)
봉규(鳳圭)
학규(學圭)
우규(佑圭)
정해열(鄭海悅)
김영원(金永元)
김택수(金宅洙)
신창현(申昶鉉)
박학규(朴學圭)
병완(炳宛)은규(殷圭)
병승(炳乘)응규(應圭)
연근(演根)병덕(炳德)준규(俊圭)
옥근(沃根)병악(炳岳)형규(衡圭)
병대(炳岱)신규(信圭)
하규(夏圭)
서규(瑞圭)
대규(大圭)
이종석(李種奭)
양주순(梁柱純)
권태규(權泰圭)
한운택(韓雲澤)
조동시(趙東始)
병윤(炳崙)황규(璜圭)
진규(晋圭)
박명구(朴明九)
서필보(徐弼輔)
임백규(任百揆)
최원영(崔元永)
채항묵(蔡恒默)
홍종연(洪鍾衍)
조병간(趙秉榦)
태순(泰淳)교근(敎根)병조(炳朝)영균(永均)
병교(炳喬)영균(永均)
명균(命均)
용균(龍均)
원석호(元錫祜)
조범하(趙範夏)
병소(炳韶)
병고(炳皐)
서두보(徐斗輔)
이창우(李昌愚)
한상이(韓象履)
인순(麟淳)
이순(頤淳)문근(汶根)병필(炳弼)흥규(興圭)
증균(曾均)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한근(漢根)병오(炳五)보균(普均)
병구(炳九)현균(賢均)
신균(愼均)
심상준(沈相駿)
이긍익(李兢翼)
송완규(宋完圭)
홍수영(洪守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