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左議政)  병덕(炳德) |
자는 성일(聖一) 호는 약산(約山).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김명순(金明淳)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가 된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이조참판·공조판서·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66년 대사헌 1867년 이후에는 세 차례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1879년 병조판서 1880년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에 오르고 곧 이어 평안도관찰사·수원부유수·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가 되었다. 1884년 우의정으로 전환국(典圜局)의 혁파 해외유학생의 소환 등 수구정책을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해 좌의정이 되고 뒤에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었다. 1891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청렴결백한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저서로는 『속간고(續諫考)』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1846.07.21 | 헌종 12년 | 직부전시(直赴殿試) |
1847.. | 헌종 13년 | 문과(文科) 헌종(憲宗) 13년(1847) 정미(丁未)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12/24) |
1847.03.03 | 헌종 13년 | 가주서(假注書) |
1847.08.17 | 헌종 13년 | 대교(待敎) |
1847.08.26 | 헌종 13년 | 정자(正字) |
1849.12.02 | 철종 즉위년 | 부수찬(副修撰) |
1849.12.08 | 철종 즉위년 | 헌납(獻納) |
1849.12.17 | 철종 즉위년 | 문겸(文兼) |
1850.01.18 | 철종 1년 | 부응교(副應敎) |
1850.02.16 | 철종 1년 | 병조정랑(兵曹正郞) |
1850.03.08 | 철종 1년 | 중학교수(中學敎授) |
1850.03.27 | 철종 1년 | 장악원정(掌樂院正) |
1850.07.19 | 철종 1년 | 사성(司成) |
1850.09.05 | 철종 1년 | 집의(執義) |
1851.09.13 | 철종 2년 | 우부승지(右副承旨) |
1851.10.05 | 철종 2년 | 우승지(右承旨) |
1852.11.01 | 철종 3년 | 대사성(大司成) |
1853.02.22 | 철종 4년 | 좌승지(左承旨) |
1853.12.24 | 철종 4년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1854.06.25 | 철종 5년 | 돈녕도정(敦寧都正) |
1854.11.13 | 철종 5년 | 이조참의(吏曹參議) |
1855.05.10 | 철종 6년 | 공조참의(工曹參議) |
1855.07.07 | 철종 6년 | 부제학(副提學) |
1856.01.19 | 철종 7년 | 예조참의(禮曹參議) |
1856.06.25 | 철종 7년 | 이조참의(吏曹參議) |
1856.07.26 | 철종 7년 | 호조참의(戶曹參議) |
1856.10.24 | 철종 7년 | 직제학(直提學) |
1856.12.30 | 철종 7년 |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1858.01.05 | 철종 9년 | 예조참판(禮曹參判) |
1858.02.16 | 철종 9년 |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
1858.08.17 | 철종 9년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1858.11.28 | 철종 9년 | 이조참판(吏曹參判) |
1859.01.09 | 철종 10년 | 봉상제조(奉常提調) |
1859.01.15 | 철종 10년 | 도승지(都承旨) |
1859.02.03 | 철종 10년 |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
1859.12.28 | 철종 10년 | 한성좌윤(漢城左尹) |
1860.08.17 | 철종 11년 | 공조판서(工曹判書) |
1861.01.13 | 철종 12년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1861.04.08 | 철종 12년 | 내의제조(內醫提調) |
1861.04.17 | 철종 12년 | 우참찬(右參贊) |
1861.06.24 | 철종 12년 | 홍문제학(弘文提學) |
1862.04.01 | 철종 13년 | 대사헌(大司憲) |
1862.06.05 | 철종 13년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1863.10.30 | 철종 14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864.12.02 | 고종 1년 | 한성판윤(漢城判尹) |
1866.02.28 | 고종 3년 | 대사헌(大司憲) |
1867.08.07 | 고종 4년 | 사옹제조(司饔提調) |
1868.02.03 | 고종 5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868.05.03 | 고종 5년 | 좌참찬(左參贊) |
1874.07.12 | 고종 11년 | 예문제학(藝文提學) |
1874.08.05 | 고종 11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874.09.20 | 고종 11년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1874.11.27 | 고종 11년 | 홍문제학(弘文提學) |
1875.06.06 | 고종 12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877.09.21 | 고종 14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879.12.08 | 고종 16년 | 병조판서(兵曹判書) |
1880.08.06 | 고종 17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881.12.08 | 고종 18년 | 평안감사(平安監司) |
1883.03.18 | 고종 20년 | 우의정(右議政) |
1884.07.12 | 고종 21년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1884.11.24 | 고종 21년 | 판중추부사 김병덕이 자인하는 상소를 올리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덕(金炳德)이 자인(自引)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편은 위태롭고 민심은 흩어진 상황인데 환난이 이미 진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덕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내가 경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너지는 집의 한 기둥과 급히 흐르는 강물에 외로이 떠있는 배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평소에 나라를 걱정하던 경의 충성심으로 또한 어찌 지나간 일을 새삼스럽게 제기하여 인책하고 물러날 명분으로 삼을 수가 있는가? 부디 물러날 생각을 하지 말고 즉시 조정으로 나오라." 하였다. |
1885.11.03 | 고종 22년 | 좌의정(左議政) |
1888.01.9 | 고종 25년 | 상량문제술관(上樑文製述官) |
1890.12.14 | 고종 27년 | 봉조하(奉朝賀) |
1892.06.23 | 고종 29년 | 졸기(卒記) 봉조하(奉朝賀) 김병덕(金炳德)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은 품성이 방정하고 지조가 꾸밈이 없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을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옮길 줄 알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도 숨김이 없었다. 깨끗한 지조를 대대로 지켜 왔으며 몸가짐은 매우 검소하였다. 사임을 윤허한 것은 비록 훌륭하게 성취시키려는 데 있었지만 나라를 짊어지고 나가는 높은 명망으로 의탁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나이는 노쇠기에 들어섰지만 정력은 아직 왕성하였는데 앓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금방 서단(逝單)의 비보가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나의 슬픔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졸한 봉조하 김병덕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시호(諡號)를 주는 절차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고 녹봉(祿俸)은 3년간 그대로 보내 주며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규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봉조하 김병덕은 일찍이 보양관(輔養官)을 지냈으니 치조(致弔)와 치제하는 절차는 사부(師傅)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
1892.08.04 | 고종 29년 | 시호(諡號) 문헌(文獻) 勤學好問(근학호문) 嚮忠內德(향충내덕)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음이 헌이다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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