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조하(奉朝賀)  이양(履陽)


자는 명여(命汝). 할아버지는 김시술(金時述)이고, 아버지는 김헌행(金憲行)이며, 어머니는 윤지술(尹志述)의 딸이다. 초명은 김이영(金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하여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하기 위해 김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계문(啓文: 왕에게 드리는 형식을 갖춘 글)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건의하는 동시에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주도록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 확보를 위하여 영남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移給: 옮겨서 지급함)해주도록 주청하여 2만 3000석을 얻는 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 임금의 요청에 의한 임금과의 대좌)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어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여류시인(女流時人)  부용(芙容)


김부용(金芙蓉)의 호는 운초(雲楚) 일명(一名) 추수(秋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예술인이다.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몰락한 선비 추당(秋堂)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달하였다 한다.
열 살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고 작은 아버지인 일화당(一和堂)에게 맡겨졌고 다시 퇴기(退妓) 설매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妓生)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6세때 성천(成川)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
김부용이 연천 김이양(金履陽)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826년에 이미 공(公)이 봉조하가 되었으므로 1831년에 김부용을 만난것은 아마도 공(公)이 유람하시다가 만난것으로 보인다. 성천부사 유관준이 평양감사인 공(公)에게 소개했다는 설은 공(公)이 평양감사를 하신적이 없고 성천부사에 유관준이라는 사람은 없다.
일설에는 김이양이 57세 때인 1811년 12월 홍경래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를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때 운초의 나이가 4살이므로 년대가 맞지 않다.김운초가 관료 김이양의 첩실이 된 것은 신묘년(1831)이다. 이때 운초는 19세였고 김이양은 77세였다.
김부용의 시집 운초기완(雲楚奇玩) 말미에 지난 신묘년에 나는 칠십칠세이셨던 연천노인의 소실이 되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김이양의 졸년이 1845년임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으로 산 기간은 14년 정도 되고 부실(副室)이 되기 전 성천의 기녀 신분일 때부터의 기간까지 감안하면 대략 20년의 인연이다.
1832년 2월. 운초는 김이양을 따라 성천에서 한양으로 이주해 왔다. 남산 기슭에 오십칸짜리 기와집을 새로 짓고 후원에는 녹천당(綠泉堂)이라는정자를 지어 초당(草堂)이라 부르고 주변 사람들은 부용(芙蓉)을 초당(草堂)마마라 불렀다.남편과 함께 한강 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한양 최고의 경화사족(京華士族)들과 여유와 자적의 문화 활동을 유감없이 만끽하였다.
김이양은 홍성 사람으로 김이양이 1843년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회방년(回榜年)을 맞아 충청도 홍성·결성·천안 일대를 성묘할 때 부인의 예로써 행차에 함께하였다.한양에서 예술활동을 할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춘(景春)·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운초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운초는 이 소실 그룹의 친구들과 19세기 여성 예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특히 김운초·경산·김금원·김경춘·박죽서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시 동아리를 결성하여 문학의 창작과 감상 향유 활동을 주도하고 예술 문화계의 선두그룹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여성 동료와 그룹이라는 면에서 주목된다.삼호정은 규당 김덕희의 소실인 금원이 기거하던 정자로 지금의 용산 전자랜드 근처에 있었다.
현재 알려진 김운초의 시는 300여 수로 시집 운초기완 운초당시고 운초시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19세기 최고의 여성 예술가로 활동했던 김운초. 그녀의 삶은 화려한 듯 쓸쓸하였다. 운초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묻히길 소원하였다. 그녀의 뜻대로 천안 광덕산 기슭 김이양의 무덤 가까운 곳에 운초의 무덤이 허허롭게 있다.운초의 무덤은 정비석 작가가 명기열전(名妓列傳)을 쓰면서 김부용의 묘를 찾기 위해서 광덕산아래 사는 서상욱(徐相旭)이라는 분을 만나 묘를 찾게 되었다고 묘를 찾는 과정을 부용 묘 제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상사곡(相思曲)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783..정조 7년생원(生員)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3위(3/100)

1795..정조 19년문과(文科)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정시(庭試) 을과(乙科) 1[亞元]위(02/24)

1795.09.13정조 19년가주서(假注書)
1796.02.22정조 20년주서(注書)
1796.02.25정조 20년검열(檢閱)
1797.12.20정조 21년문겸(文兼)
1798.03.24정조 22년전라도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
1798.04.08정조 22년고령현감(高靈縣監)
1798.05.28정조 22년별겸춘추(別兼春秋)
1798.09.02정조 22년부교리(副校理)
1798.09.06정조 22년검상(檢詳)
1798.09.09정조 22년수찬(修撰)
1798.10.22정조 22년병조정랑(兵曹正郞)
1798.11.03정조 22년서산군수(瑞山郡守)
1799.09.28정조 23년우통례(右通禮)
1799.09.28정조 23년응교(應敎)
1799.09.28정조 23년동부승지(同副承旨)
1799.11.17정조 23년충청감사(忠淸監司)
1800.08.04순조 즉위년경상감사(慶尙監司)
1802.07.11순조 2년병조참의(兵曹參議)
1802.09.16순조 2년동부승지(同副承旨)
1802.10.04순조 2년분승지(分承旨)
1802.11.20순조 2년우부승지(右副承旨)
1803.01.09순조 3년이조참의(吏曹叅議)
1803.03.20순조 3년대사간(大司諫)
1803.06.24순조 3년이조참의(吏曹叅議)
1803.08.07순조 3년병조참지(兵曹叅知)
1803.10.01순조 3년대사간(大司諫)
1804.01.10순조 4년예조참의(禮曹參議)
1805.01.03순조 5년이조참의(吏曹叅議)
1805.03.09순조 5년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
1805.04.01순조 5년병조참판(兵曹參判)
1805.06.13순조 5년공조참판(工曹參判)
1806.05.01순조 6년도승지(都承旨)
1807.06.22순조 7년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1808.10.27순조 8년이조참판(吏曹叅判)
1811.06.01순조 11년병조참판(兵曹參判)
1811.08.03순조 11년이조참판(吏曹叅判)
1812.01.01순조 12년함경감사(咸鏡監司)
1812.09.01순조 12년개명이영(履永)에서 이양(履陽)

1813.04.15순조 13년정헌대부(正憲大夫)
1815.02.06순조 15년한성판윤(漢城判尹)
1815.02.20순조 15년장악제조(掌樂提調)
1815.03.01순조 15년예조판서(禮曹判書)
1815.06.05순조 15년좌참찬(左參贊)
1815.06.21순조 15년이조판서(吏曹判書)
1815.07.20순조 15년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1815.08.23순조 15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815.10.03순조 15년한성판윤(漢城判尹)
1815.11.05순조 15년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16.06.11순조 16년호조판서(戶曹判書)
1816.07.16순조 16년이조판서(吏曹判書)
1817.07.28순조 17년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818.03.14순조 18년병조판서(兵曹判書)
1818.04.13순조 18년예문제학(藝文提學)
1819.08.23순조 19년유도대장(留都大將)
1819.11.26순조 19년호조판서(戶曹判書)
1819.12.03순조 19년홍문제학(弘文提學)
1820.09.24순조 20년공조판서(工曹判書)
1821.09.27순조 21년형조판서(刑曹判書)
1822.02.08순조 22년예조판서(禮曹判書)
1823.08.28순조 23년호조판서(戶曹判書)
1824.10.01순조 24년수원유수(水原留守)
1826.02.15순조 26년예조판서(禮曹判書)
1826.06.14순조 26년봉조하(奉朝賀)
1845.05.03헌종 11년증(贈)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이양(履陽)
구휘(舊諱)이영(履永)
자(字)명여(命汝)
호(號)연천(淵泉)
생(生)1755년 을해(乙亥) 12월 12일
관직(官職)계묘(癸卯)생원(生員)
을묘(乙卯)문과(文科)
제학(提學)
기사(耆社)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이조(吏曹)판서(判書)
봉조하(奉朝賀)
졸(卒)1845년 을사(乙巳) 4월 28일
배(配)정경부인(貞敬夫人)완산이씨(完山李氏)
생(生)1752년 임신(壬申) 월 일
졸(卒)1828년 무자(戊子) 12월 18일
묘(墓)천안광덕면광덕산(廣德面廣德山)
자좌(子坐) 합폄(合窆)
 부(父)명상(明祥)
 조(祖)군수(郡守) 익지(翊之)
 증조(曾祖)좌의정(左議政) 관명(觀命)
 외조(外祖)홍성원(洪聖源) 본(本) 남양(南陽)
배(配)김부용(金芙容)
생(生)1813년 계유(癸酉) 월 일
묘(墓)천안 광덕면 광덕산(廣德面廣德山)
 운초기완
18 세19 세20 세21 세22 세
성익(盛益)시발(時發)교행(敎行)이인(履仁)희순(羲淳)
양순(陽淳)
이광유(李光裕)
윤경숙(尹景肅)
이헌기(李憲琦)
이례(履禮)양순(陽淳)
조철영(趙哲永)
민치복(閔致福)
이인창(李寅昌)
이준수(李俊秀)
이존원(李存源)
수행(修行)이성(履性)정순(政淳)
이희갑(李羲甲)
홍재신(洪在愼)
이경(履憬)정순(政淳)
돈순(敦淳)
철순(敠淳)
이의근(李義根)
이은연(李隱淵)
이상적(李尙迪)
이종혁(李鍾赫)
이후제(李厚濟)
이유(李維)
임재인(林載麟)
윤명연(尹明淵)
시철(時哲)교행(敎行)
우행(友行)이실(履實)경순(慶淳)
민백림(閔百林)
황기섭(黃基燮)
순행(順行)이평(履平)석순(錫淳)
옥순(沃淳)
목순(穆淳)
격순(格淳)
심능만(沈能萬)
이초(履初)석순(錫淳)
이헌도(李憲度)
윤육(尹堉)
이업(履業)대순(大淳)
이구(履耉)
이병(履秉)
이경(履敬)항순(恒淳)
송재연(宋在淵)
정연(鄭槤)
시술(時述)헌행(憲行)이양(履陽)한순(漢淳)
해순(海淳)
이조식(李祖植)
서윤보(徐崙輔)
이정재(李政在)
홍상전(洪相傳)
이만영(李晩永)
홍병건(洪秉健)
이규열(李奎說)
시길(時吉)건행(騫行)이노(履魯)태순(太淳)
우순(愚淳)
능순(能淳)
권중선(權中歚)
이승조(李承祖)
이휘(履徽)일순(一淳)
이근호(李根祜)
이광연(李廣淵)
윤경열(尹經烈)
이하(履夏)구순(久淳)
후순(厚淳)
이득신(李得信)
이양모(李亮模)
윤경화(尹景和)
이노진(李魯進)
연행(淵行)이명(履命)우순(愚淳)
이의협(李義協)
이좌원(李左源)
이상우(李尙友)
장행(長行)이의(履宜)득순(得淳)
낙순(樂淳)
이교민(李敎敏)
이희(李熙)
심유진(沈有鎭)
시일(時逸)약행(若行)이우(履꽗)화순(華淳)
이제순(李濟純)
신세현(申世顯)
이상(履庠)기순(箕淳)
이서(履序)두순(斗淳)
기순(箕淳)
민치항(閔致恒)
이염(履廉)화순(華淳)
대순(岱淳)
이용(履庸)상순(相淳)
이강(履康)규순(奎淳)
구순(球淳)
옥순(玉淳)
복순(福淳)
민치협(閔致協)
이응오(李應五)
이노간(李魯簡)
묵행(默行)이구(履矩)주순(疇淳)
덕순(德淳)
변윤우(邉潤雨)
이규익(李奎翊)
직행(直行)이수(履秀)홍순(弘淳)
성순(成淳)
승순(承淳)
이재신(李在信)
이규(履奎)영순(榮淳)
정순(程淳)
대순(垈淳)
흥순(興淳)
조주철(趙周喆)
이병진(李秉震)
이휴(履休)성순(成淳)
안홍원(安弘遠)
권사목(權思穆)
황인휴(黃仁烋)
이의항(李宜恒)
시눌(時訥)헌행(憲行)
낙행(樂行)이호(履祜)석순(碩淳)
한순(漢淳)
헌순(獻淳)
이의완(李義完)
윤업(尹곎)
이진(履禛)장순(章淳)
현순(顯淳)
경순(慶淳)
원재양(元在陽)
이정도(李鼎度)
이병은(李秉殷)
이위(履褘)형순(亨淳)
유순(有淳)
기순(夔淳)
온순(蘊淳)
주순(周淳)
윤치승(尹致承)
이경(李坰)
권중이(權中履)
익행(翼行)이협(履協)동순(東淳)
이태(履台)규순(奎淳)
성순(星淳)
갑순(甲淳)
철순(哲淳)
이학부(李鶴溥)
송덕수(宋德洙)
정해길(鄭海吉)
류익주(柳翼周)
이각(履恪)호순(鎬淳)
이승부(李承溥)
이현재(李顯在)
조영순(趙榮順)
임시습(任時習)
황재곤(黃載坤)
이현지(李顯之)
이수(李綬)
신야(申埜)
이서성(李瑞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