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大司諫)  보순(普淳) |
부(父) 김이적(金履迪)과 수양(秀良)의 딸 진천송씨(鎭川宋氏) 사에에서 1724년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여박(汝博)이고 형이 대사헌(大司憲) 노순(魯淳)이다. 1759년 문과에 급제한뒤 정언(正言) 지평(持平) 승지(承旨)를 거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올랐다. |
1754.. | 영조 30년 | 생원(生員) 영조(英祖) 30년(175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27위(57/100) |
1759.. | 영조 35년 | 문과(文科)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14/56) |
1759.05.15 | 영조 35년 | 검열(檢閱) |
1759.08.23 | 영조 35년 | 예조좌랑(禮曹佐郞) |
1759.09.25 | 영조 35년 | 정언(正言) |
1760.12.05 | 영조 36년 | 문학(文學) |
1762.03.21 | 영조 38년 | 지평(持平) |
1762.11.16 | 영조 38년 | 병조좌랑(兵曹佐郞) |
1763.04.16 | 영조 39년 | 경기도사(京畿都事) |
1764.02.08 | 영조 40년 | 이조좌랑(吏曹佐郞) |
1764.05.28 | 영조 40년 | 귀양 지평 김보순(金普淳)을 정의현(旌義縣)에 귀양보냈다. 김보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40년간 고심하신 바가 당(黨)을 없애는 데에 있었는데, 궐정에 들어온 신하로 누가 감히 다시 당심(黨心)을 품겠습니까? 상하가 화합하는 데에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니 성상께서 다시는 신하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심이 소망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의심하고 멀리하는 것이 임금에게 있느냐, 신하에게 있느냐? 당습(黨習)이 잇달아 이루어진 것은 하나의 ‘의(疑)’ 자가 근본이 되는 것이다. 어찌 감히 방자하게 반교하는 날에 아뢰느냐?\" 하고, 드디어 귀양보낸 것이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1765.11.18 | 영조 41년 | 부안현감(扶安縣監) |
1767.06.27 | 영조 43년 | 정언(正言) |
1770.04.03 | 영조 46년 | 사서(司書) |
1771.02.08 | 영조 47년 | 수찬(修撰) |
1771.02.10 | 영조 47년 | 부교리(副校理) |
1771.03.14 | 영조 47년 | 귀양 전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을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유언호(兪彦鎬)·이병정(李秉鼎)·김보순(金普淳)을 모두 남해(南海)·거제(巨濟)·웅천(熊川)에 정배(定配)하고, 김재인(金載人)·김문순(金文淳)·채정하(蔡挺夏)는 영남(嶺南)의 바닷가에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권진응은 신구(伸救)(죄가 없슴을 변명하여 구원함) 하였기 때문이었다. |
1772.01.26 | 영조 48년 | 수찬(修撰) |
1772.05.13 | 영조 48년 | 교리(校理) |
1772.07.01 | 영조 48년 | 북평사(北評事) |
1773.08.05 | 영조 49년 | 필선(弼善) |
1773.12.01 | 영조 49년 | 종부시정(宗簿寺正) |
1774.03.29 | 영조 50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776.07.05 | 정조 즉위년 | 병조참의(兵曹參議) |
1776.07.13 | 정조 즉위년 | 대사간(大司諫) |
문충공(상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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