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728.12.28영조 4년돈녕참봉(敦寧叅奉)

1730.02.12영조 6년효능봉사(孝陵奉事)

1731.03.17영조 7년제용직장(濟用直長)

1732.10.12영조 8년인의(引儀)

1733.03.27영조 9년진안현감(鎭安縣監)

1742.08.25영조 18년사복판관(司僕判官)

1747.08.05영조 23년임피현령(臨陂縣令)

1749.03.25영조 25년양근군수(楊根郡守)

1752.11.07영조 28년한산군수(韓山郡守)

1757.06.23영조 33년장성부사(長城府使)

1759.05.28영조 35년광주목사(光州牧使)

1762.02.18영조 38년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762.04.14영조 38년돈녕도정(敦寧都正)

1763.04.10영조 39년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1767.05.07영조 43년상소
전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김시교(金時敎)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의 시조(始祖)인 고려(高麗)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은 태사 권행(權幸), 태사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조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안동부(安東府)에서 묘식(廟食)하고 있어 백세(百世) 동안 그 위차(位次)를 바꾸지 않고 작헌(酌獻)하는 데 스스로 일정한 차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권씨(權氏)의 자손들이 억지로 그릇된 의논을 창작(創作)해 내어 권공의 덕(德)이 두 공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항상 행하던 예를 마음대로 고쳐 마침내 제2위 중앙에 있던 권태사에게 차례를 건너뛰어 먼저 헌작하였으니, 일의 체면이 전도되고 어진 백성들이 못내 한탄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신의 족조(族祖) 고(故)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신 김상헌(金尙憲)이 고 참판 권태일(權泰一)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변한 것이 매우 자세하며, 옛날 선조(先朝) 임술년 에 신의 할아버지 고 돈녕 도정(敦寧都正) 신 김수일(金壽一)이 상소하여 첨지(僉知) 권열(權說)과 서로 논변하였습니다. 그때에 예당(禮堂)이 조목을 들어 회계하니, 우리 숙종 대왕께서 특별히 처분을 내려 신들의 시조를 수향(首享)으로 삼아 먼저 헌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사년에 이르러 권유(權愈) 등이 환설(幻說)을 상소하고 역적 민암(閔黯)이 또 종백(宗伯) 으로서 꾸며서 복계(覆啓)하여, 마침내 이미 바로 된 예로 하여금 다시 잘못을 답습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심지어 묘비(廟碑)는 ‘권태사묘정비(權太師廟庭碑)’라 쓰고 제축(祭祝)은 ‘몇대손 헌작’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한 고을의 조두(俎豆)하는 곳이요, 또 공전(公田)을 특별히 내린 전례(典禮)가 있어 체계가 자별한데, 천년 가까이 사민(士民)이 공적으로 받들던 사원을 갑자기 변경하여 권씨 성들이 독단하는 사묘(私廟)를 삼았으니, 잘못된 일치고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고 판서 권이진(權以鎭)은 비록 그 자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본부에 부임했을 때에 이런 잘못된 풍습을 보고는 축연히 부끄럽고 두려워하여 즉시 첩(帖)을 내려 계칙(戒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권씨 성이 마음대로 공묘(公廟)를 변경하여 사묘(私廟)로 삼았으니, 함께 향사(享祀)하는 뜻을 모조리 잃게 되었고, 축문에 손(孫)이라고 일컫는 데에 이르러서는 예절과 사체가 당초 사당을 세운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김씨·장씨 두 태사(太師)가 어찌 사리(事理)에 어긋난 제사를 기꺼이 흠향하겠으며, 이미 기꺼이 함께 흠향하지 않는다면 우리 권 태사 역시 어찌 기꺼이 홀로 흠향하겠는가? 그 예의(禮義)에 있어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인데도 여러 권씨들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병오년 봄에 신들이 여러 권씨들과 더불어 각기 변소(辨疏)를 진달하여 해부(該府)로 하여금 품재(稟裁)하라는 비답을 받았으나, 해조에서 복계를 아직껏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빨리 해조로 하여금 속히 회계(回啓)하게 하고 인하여 바로잡아 주소서.\" 하였다.
1771.06.29영조 47년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773.12.26영조 49년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안동김씨대종중
휴암공(상준)파
시교(時敎)
자(字)정숙(正叔)
생(生)1693년 계유(癸酉) 8월 10일
관직(官職)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졸(卒)1779년 기해(己亥) 8월 6일
배(配)정부인(貞夫人)함종어씨(咸從魚氏)
생(生)1692년 임신(壬申) 월 일
졸(卒)1751년 신미(辛未) 4월 24일
묘(墓)양주 금촌(金村)
곤좌(坤坐) 합폄(合窆)
 부(父)국구(國舅)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유구(有龜)
 조(祖)우윤(右尹) 증(贈)영의정(領議政) 사형(史衡)
 증조(曾祖)감사(監司) 증(贈)찬성(贊成) 진익(震翼)
 외조(外祖)이만모(李萬模) 본(本) 전의(全義)
16 세17 세18 세19 세20 세
광위(光煒)수익(壽翼)성대(盛大)시서(時叙)현행(顯行)
면행(勉行)
근행(謹行)
선행(善行)
이동필(李東馝)
안표(安杓)
이국현(李國贒)
시교(時敎)백행(百行)
극행(克行)
인행(仁行)
신행(信行)
홍기한(洪綺漢)
신광준(申光儁)
홍익열(洪益烈)
변경진(邉慶進)
서종집(徐宗集)
성시(盛始)천서(天叙)사행(士行)
재행(在行)
송병장(宋炳章)
윤동흥(尹東興)
명서(明叙)안행(安行)
우행(寓行)
인행(寅行)
완행(完行)
최행(㝡行)
박영조(朴永祖)
남노(南魯)
정서(正叙)인행(寅行)
득서(得叙)재달(在達)
재귀(在貴)
재흥(在興)
오수항(吳守恒)
변태흥(邉泰興)
이준(李焌)
남시훈(南時薰)
신국화(申國華)
정집(鄭緝)
상원창(尙元昌)
성중(盛中)구서(九叙)정행(鼎行)
익행(益行)
이희겸(李喜謙)
주서(疇叙)진행(晋行)
제행(濟行)
장행(壯行)
이공화(李恭華)
민효중(閔孝仲)
이서(彛叙)이익구(李益龜)
윤서(倫叙)박상협(朴尙浹)
정윤세(鄭胤世)
윤후교(尹厚敎)
윤사유(尹師有)
류중임(柳重臨)
이춘진(李春鎭)
장진환(張震煥)
성계(盛季)구서(龜叙)윤행(潤行)
건행(健行)
고행(顧行)
이사민(李思閔)
정중윤(鄭重胤)
이수인(李守仁)
장두팔(張斗八)
박선(朴縇)
박필성(朴弼成)
수기(壽箕)성희(盛希)시곤(時昆)광행(光行)
시화(時華)익행(益行)
성옥(盛玉)영준(英俊)유경(有璟)
유원(有귍)
호영(好瑛)
시영(時英)
전득종(全得宗)
손태래(孫泰來)
허면(許冕)
정주주(鄭周胄)
심경망(沈景望)
최집(崔㙫)
수일(壽一)
수규(壽奎)성구(盛久)시태(時泰)관행(觀行)
서명보(徐命寶)
심일(沈鎰)
허숙(許긡)
송순상(宋純相)
시정(時鼎)윤행(允行)
치행(致行)
남조언(南祖彦)
민용(閔鎔)
시복(時復)의행(誼行)
홍중장(洪重章)
이해(李瀣)
오명주(吳命胄)
신한장(申漢章)
정헌주(鄭憲周)
이번(李瀿)
박환규(朴桓圭)
남궁배(南宮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