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左議政)  상헌(尙憲) |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 등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1570년(선조 3) 6월 3일에 서울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연보]에는 어머니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김극효(金克孝 1542〜1618.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는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고 양구(楊口)ㆍ동복현감(同福縣監)ㆍ금산군수(錦山郡守)ㆍ돈녕부 도정ㆍ동지돈녕부사 등 주로 외직이나 중앙의 한직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가의 성세는 대단했다. 우선 외조 정유길(鄭惟吉 1515∼1588. 본관 동래)은 좌의정을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인 대신이었다. 정유길의 조부는 중종 중반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고 증조는 성종 때 이조ㆍ공조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좌리(佐理)공신에 책봉된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었다. 후손들도 매우 뛰어났는데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鄭昌衍 1552∼1636)은 좌의정 손자 정광성(鄭廣成 1576∼1654)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 뒤에도 이 지파에서는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영의정) ㆍ정치화(鄭致和 1609∼1677. 좌의정)ㆍ정만화(鄭萬和 1614∼1669. 이조참판)ㆍ정재숭(鄭載嵩 1632∼1692. 우의정)ㆍ정석삼(鄭錫三 1684∼1729. 호조참판)ㆍ정홍순(鄭弘淳 1720∼1784. 우의정) 등 조선 후기의 주요한 대신을 여럿 배출했다. 조선 중기부터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혈통)이 중시되면서 양자 입적이 활발해지는데 김상헌은 자신이 입적되고 후손도 입적시키는 이례적인 경험을 모두 겪었다. 그는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 1531〜1572)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별세하자 그에게 입적되었다(1572년〔선조 2〕). 9세부터 친부에게서 글을 배웠고(1578년〔선조 11〕) 12세 때는 천연두에 걸려 아주 위독했다가 이듬해에야 간신히 나았다(1582년〔선조 15〕). 그 뒤 김상헌은 15세 때 성주(星州) 이씨(선전관 이의로〔李義老〕의 딸)과 혼인했고(1585년〔선조 18〕) 5년 뒤인 20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1590년〔선조 23〕). 그가 겪은 첫 번째 큰 전란인 임진왜란은 아직 출사하기 전인 22세 때 발발했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했다가 겨울에 강화를 거쳐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宗慶. 1589년〔선조 22〕 출생)이 3세로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다. 전란의 와중인 1596년(선조 29) 가을에 김상헌은 과거에 급제해(19명 중 13등) 승문원 부정자로 출사했다. 길고 화려했지만 당시의 주요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험난한 관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선조가 붕어하는 1608년까지 10여 년 동안 김상헌은 이런저런 중하급 관직을 거쳤다. 중앙에서는 저작ㆍ박사ㆍ예조ㆍ이조좌랑ㆍ부수찬ㆍ지제교ㆍ정언ㆍ예조정랑 같은 청요직에 근무했고 외직으로는 제주 안무어사(按撫御史)ㆍ함경도 고산도(高山道) 찰방(察訪)ㆍ경성판관(鏡城判官)ㆍ개성부 경력 등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부기할 사항은 두 가지인데 우선 1602년(선조 35)에 고산도 찰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먼 외직에 발령된 것은 당시 실세였던 유영경(柳永慶 1550∼1608)과의 알력 때문이었는데 앞서 그가 대사헌에 임명되는 데 김상헌이 반대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음으로 둘째 형 김상관(金尙寬)의 아들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을 후사로 들인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1607년〔선조 40〕). 뒤에서 쓰겠지만 바로 이 김광찬의 후손에서 조선 후기의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계보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김상헌은 친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픔은 후대의 커다란 영광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김상헌에게 광해군의 치세는 대체로 침체와 불행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의정부 사인ㆍ교리ㆍ사간ㆍ응교ㆍ직제학ㆍ동부승지 같은 비중있는 관직을 지냈지만 빛보다는 그늘이 더 짙었다. 첫 시련은 1611년(광해군 3)에 파직된 것이었다. 원인은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라고 불리는 우찬성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상소였다. 그 논지의 당부(當否: 옳고 그름)와 상관없이 그 글은 조선시대에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문건의 하나일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 글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 이황을 변론해 배척하고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김상헌은 동료들과 함께 정인홍을 강력히 비판했다. “정인홍의 사람됨은 젊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벽되고 막힌 것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이런 말을 했으니 어찌 노망이 들어 어두운 탓이 아니겠습니까. 정인홍은 자신이 스승으로 섬긴 사람과 존숭하는 사람을 추존해 후세에 드러나게 하려고 하면서 스승을 존숭하는 도리는 지나치게 아름다움만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도리어 후세의 비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곧 복직되기는 했지만 김상헌은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에도 아들 김광찬이 역모로 몰려 옥사한 김제남(金悌男. 선조의 국구이자 영창대군의 외조)의 손녀사위라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에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었다. 1618년(광해군 10) 2월 생부 김극효가 세상을 떠났고 3년 뒤에는 생모 정씨가(1621년〔광해군 13〕) 그 이듬해에는 모친 이씨가 별세했다(1622년). 그는 본관인 안동과 거주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을 오가며 삼년상을 치렀다. 1623년 3월에 광해군과 북인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인조와 서인이 집권하면서 김상헌은 서인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차례의 호란이 상징하듯이 인조의 치세에 국가와 국왕ㆍ신민은 모두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나이인 50세를 넘긴 김상헌은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행동으로 그 난관에 맞섰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김상헌은 석실의 움막에서 복상하고 있었다. 53세의 나이였다. 이듬해 4월에 탈상한 그는 1625년(인조 3)까지 이조ㆍ형조참의ㆍ대사간ㆍ우부승지ㆍ도승지ㆍ대사헌ㆍ부제학 같은 주요한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때 대륙에서는 명의 몰락과 청의 흥기라는 중국사의 마지막 왕조 교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1626년 8월에 김상헌은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파견되었다. 주요한 임무는 당시 가도(椵島)에 주둔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명나라의 무장 모문룡(毛文龍)과 관련된 사정을 명 조정에 해명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호란은 그가 북경에 도착한 직후에 발발했다. 1627년(인조 5) 3월에 북경에서 그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명에 원병을 주청했지만 정묘호란은 개전 두 달 만에 종결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상헌은 형조ㆍ예조ㆍ공조판서ㆍ우참찬ㆍ대사헌 등 중직에 두루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석실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석실에 있었다. 66세의 노대신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함)한 조정을 뒤따라 들어갔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김상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데 반대했고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지은 항복 국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음집] <연보>). 1637년 1월에 김상헌은 죽음을 결행하기도 했다. 엿새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풀어주어 살아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 거의 죽을 뻔한 것이다. 그달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노대신의 마음은 그지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상헌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물론 반청(反淸)의 댓가였다. 1637년 2월 7일에 그는 안동으로 낙향했다. 형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였다. 3년 뒤인 1640년(인조 18) 11월에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김상헌이라는 인물이 관작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조정에서는 그를 심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그가 도성을 지날 때 인조는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을 내려 위로했다. 경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로는 군신 사이지만 정리로는 부자와 같다. 뜻밖에 화란이 터져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했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해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바란다. 김상헌은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끝내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모자랍니다”라고 화답했다. 그를 만나고 온 신하들은 행동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김상헌은 1641년(인조 19) 심양의 북관(北館)에 구류되었다. 그해 11월 부인 이씨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도 병이 심해져 12월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가 1643년 1월에 다시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대표적 주화론자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와 있었다. 16세 차이로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이 포로의 신세로 주고받은 시는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명길은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네(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라고 읊었고 김상헌은 그 운에 맞춰 이렇게 화답했다. 성패는 천운에 관계되어 있으니 成敗關天運 의(義)에 맞는가를 보아야 하리 須看義與歸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雖然反夙暮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 詎可倒裳衣 권도(權道)는 현인도 그르칠 수 있지만 權或賢猶誤 정도(正道)는 많은 사람들이 어기지 못하리 經應衆莫違 이치에 밝은 선비께 말하노니 寄言明理士 급한 때도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기를 造次愼衡機 김상헌을 비롯한 조선 지식인 대부분의 정신적 지주였던 명은 1644년(인조 22)에 멸망했다. 그때 김상헌은 74세였다. 그는 여러 시편에서 이에 대한 소회를 적었는데 그 중 한편은 다음과 같다. 지난 날 사신으로 입조해 빈객이 되니 奉節朝周昔作賓 바다 같은 황제 은혜 신하에게 미치었네 皇恩如海到陪臣 하늘과 땅이 뒤엎어진 오늘을 만나니 天翻地覆逢今日 아직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었구나 ;未死羞爲負義人 이듬해 2월에 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석실로 돌아갔다. 소현세자는 두 달 뒤 급서했다. 이때부터 별세할 때까지 김상헌은 주로 석실에 머물렀다. 1646년(인조 24) 3월에는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무려 32번이나 사직해 한직인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이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열흘 정도 머물렀는데 함께 [근사록(近思錄)]에 나오는 중요한 말을 선정했다. 1649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한번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고사했다. 그 대신 10월에 임금을 알현하면서 인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대사헌 김집(金集)을 중용할 것을 당부했다. ‘숭명배청’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대신의 일생은 3년 뒤인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로 마감되었다. 그는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모셔졌으며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37세 차이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인 송시열은 스승을 이렇게 기렸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류가 전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선생 같은 분을 내어 한 번 다스려질 조짐을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이미 선생 같은 분을 내었는데 사람이 도리어 선생 같은 분을 숨겨 두려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게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압축하는 표현은 ‘삼수육창(三壽六昌)’이다. ‘삼수’는 양자인 김광찬의 세 아들 김수증(金壽增 1624∼1701. 공조참판)ㆍ김수흥(金壽興 1626∼1690. 영의정)ㆍ김수항(金壽恒 1629∼1689. 영의정)이고 ‘육창’은 김수항의 여섯 아들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영의정)ㆍ김창협(金昌協 1651∼1708. 대사간ㆍ대사성)ㆍ김창흡(金昌翕 1653∼1722)ㆍ김창업(金昌業 1658∼1721)ㆍ김창즙(金昌緝 1662∼1713)ㆍ김창립(金昌立 1666∼1683)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김달행(金達行)-김이중(金履中)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에 이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계보의 영향력과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상헌의 생각과 행동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 당부를 논란하는 것은 이 짧은 글의 범위를 넘는 일이다. 끝으로 그가 지은 한 시조(“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등지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시대상황과 작자의 마음을 잘 담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강린당(講麟堂)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 |||||||||||||||||||||||||||||||||||||||||||||||||||||||||||||||||||||||||||||||||||||||||||||||||||||||||||||||
김상헌묘(金尙憲墓)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 | |||||||||||||||||||||||||||||||||||||||||||||||||||||||||||||||||||||||||||||||||||||||||||||||||||||||||||||||
남사록(南槎錄)남사록』은 1601년(선조 34) 7월에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 소덕유 역모사건’으로 인한 불안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제주안무어사로 파견된 김상헌이 제주목사 성윤문의 보고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 |||||||||||||||||||||||||||||||||||||||||||||||||||||||||||||||||||||||||||||||||||||||||||||||||||||||||||||||
독례수초(讀禮隨鈔)淸陰 金尙憲(1570~1652)이 『小學』에 인용된 구절을 제외한 『禮記』의 원문 가운데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을 초출하고 注疏를 인용하여 붙여 편찬한 예서이다. | |||||||||||||||||||||||||||||||||||||||||||||||||||||||||||||||||||||||||||||||||||||||||||||||||||||||||||||||
목석거유허비(木石居遺墟碑)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 |||||||||||||||||||||||||||||||||||||||||||||||||||||||||||||||||||||||||||||||||||||||||||||||||||||||||||||||
삼구정(三龜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3호 | |||||||||||||||||||||||||||||||||||||||||||||||||||||||||||||||||||||||||||||||||||||||||||||||||||||||||||||||
청음시비(淸陰詩碑)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무궁화동산(구 궁정동안가) | |||||||||||||||||||||||||||||||||||||||||||||||||||||||||||||||||||||||||||||||||||||||||||||||||||||||||||||||
청음안동시비(淸陰安東詩碑)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생태공원 | |||||||||||||||||||||||||||||||||||||||||||||||||||||||||||||||||||||||||||||||||||||||||||||||||||||||||||||||
청음집(淸陰集)40권 14책. 목판본. 1671년(현종 12)경 저자가 직접 편정(編定)한 초고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1861년(철종 12) 그의 종10세손 세균(世均)에 의해 완판(?板)이 보판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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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경기도 남양주시 석실마을에 있었던 조선후기 김상용과 김상헌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 |||||||||||||||||||||||||||||||||||||||||||||||||||||||||||||||||||||||||||||||||||||||||||||||||||||||||||||||
학동서원(鶴東書院)1738년(영조 14) 안동부 법상동에 세워진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鶴東書院이 안동의 남인계 사림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훼철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론계가 남인들의 본거지인 안동에 자신들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서원을 세우려고 시도하다 일어난 충돌이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최초로 시도된 것은 1721년이었다. 당시 안동부사로 내려온 김진옥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932년 부사 李德孚와 법전에 거주하는 노론계 士人인 姜元一에 의해 재차 시도되었으나 남인계 士人들의 반발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의 창건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1738년 경상도 관찰사로 유척기가, 안동부사로 魚有龍이 부임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안동 내부에서는 법전을 세거지로 하는 강원일의 진주 강씨 문중, 안동가구를 세거지로 하는 安宅駿의 순흥 안씨 문중 그리고 申思國이 중심이 된 평산 신씨 문중이 주축이 되었으나 경제적 지원 등은 감영과 안동부에서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학동서원의 건립시도는 `무신란과 같은 逆亂이 안동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일부 노론계 사족들이 참여하였지만 建院을 주도한 것은 안동부사 어유룡과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였다. 건원론자들은 서원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이 권덕수?류몽화 등 무신란 관련 혐의가 있던 인사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 중 상당수는 무신란 당시 擧義하여 의병을 조직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은 김경헌?류정화 등 2인만 遠配되는 처벌을 받게 되고, 오히려 서원 건립을 강행한 관찰사 유척기와 안동부사 어유룡은 파직되는 등 건원론자들에게 불리하게 정리되었다. 이는 국왕인 영조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영조는 무신란(1728년)이후 영남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었는 바 그렇지 않아도 불만에 차있는 영남인의 조정에 대한 불신과 감정을 촉발시켜 또하나의 무신란과 같은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지방관과 훼철 주동자만 처벌하는 조치로 미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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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암(隱者巖)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입구 | |||||||||||||||||||||||||||||||||||||||||||||||||||||||||||||||||||||||||||||||||||||||||||||||||||||||||||||||
청원루(淸遠樓)안동 청원루(安東 淸遠樓)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 |||||||||||||||||||||||||||||||||||||||||||||||||||||||||||||||||||||||||||||||||||||||||||||||||||||||||||||||
목석거(木石居)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先生木石居遺墟碑)는 조선 중기의 대 선생이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살았던 옛터를 기념하여 그의 7대손인 화서(華棲)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세운 기념비이다. 비문은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지었다. |
1590.. | 선조 23년 | 진사(進士)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9위(14/100) |
1596.. | 선조 29년 | 문과(文科) 선조(宣祖) 29년(1596) 병신(丙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8위(13/19) |
1600.02.23 | 선조 33년 | 예조좌랑(禮曹佐郞) |
1600.12.14 | 선조 33년 | 부수찬(副修撰) |
1600.12.29 | 선조 33년 | 정언(正言) |
1601.01.01 | 선조 34년 | 이조참의(吏曹佐郞) |
1601.05.03 | 선조 34년 | 교리(校理) |
1601.08.01 | 선조 34년 | 제주안무어사(濟州安撫御史) |
1601.11.01 | 선조 34년 | 제주안무어사 김상헌의 보고 신이 본주(本州)에 이른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하루 이틀 이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바다 섬의 기후가 본래 이와 같은 것으로 괴이할 것이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뒤에야 유생(儒生)과 고로(故老)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금년 9월 이후부터 항상 흐리고 계속 비가 내려 여러 달 개이지 않아 여름철보다 더 심하다. 지금 거센 바람이 크게 일어 밤낮 그치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재변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직접 본 바로는 도로가 진창이 되어 봄·여름의 장마철과 같고 들판에 가을 곡식이 손상되어 태반이나 잎이 시들고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손을 놓고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굶주려서 곤핍한 상황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가을인데도 이러하니 어떻게 해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곳 백성들의 처지가 실로 애처롭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이번 역옥(逆獄)을 다루는 데 있어 조정에서 아무리 공평하게 판결하려고 했더라도 연루된 자에 대해 오늘날까지 단죄하지 아니하였으니 혹 약간의 억울한 원죄(冤罪)가 있음을 면하지 못하며 그 중에 허다히 연좌된 사람은 또 반드시 다 역모(逆謀)한 자인 줄을 모르는데 여러 날 동안 가두어 두어 장차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상황이므로 섬 안의 인심이 다 복종하지 않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괴이한 기운이 재이를 초래하여 비상한 재앙이 내려진 것인 듯합니다. 그 허물의 소재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무휼(撫恤)하는 정책은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軫念)하여 특별히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백성이 남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또한 국가가 남쪽 지방을 돌아보는 근심을 조금은 풀 수 있을 것입니다. 濟州安撫御史金尙憲馳啓曰: 臣到本州 經旬踰月 而其間一二日外 無日不雨 無日不風 以爲海國氣候 本來如此 無足怪者 久乃詢于儒生故老 則自今年九月以後 恒陰連雨 積月不開 有甚於夏 今盲風大作 晝夜不止 此實近古所未有之災異云云。 臣目見道路(浞) 淖 如春夏霖潦之時 田野之間 秋穀自損 太半(委) 葉腐爛不收 農民束手 處處呼泣。 飢荒困乏之狀 所不忍見。 秋而如此 何以卒歲? 此地民生之事 實爲矜惻。 臣竊意 今番逆獄之治 朝廷雖務爲平反 株連根逮者 至今不斷 或未免。 有若干橫枉之冤 其中許多緣坐之人 又未必盡知逆謀 而囚繫累日 奄奄將死 島內人心 不能咸服 以之乖氣致異 災沴非常。 不敢知厥咎攸在 前頭撫恤之策 朝廷各別軫念 特垂寬貸之典 庶幾遺民 得保餘喘 抑亦國家少紓南顧之憂。 |
1602.02.13 | 선조 35년 | 고산찰방(高山察訪) |
1605.08.07 | 선조 38년 | 경성판관(鏡城判官) |
1606.. | 광해군 즉위년 | 문과(文科) 광해군(光海君) 즉위년(1608) 무신(戊申) 중시(重試) 을과(乙科) 1[探花]위(03/09) |
1607.01.22 | 광해 1년 | 검상(檢詳) |
1607.06.01 | 선조 40년 | 개성경력(開城經歷) |
1607.08.30 | 광해 1년 | 사간(司諫) |
1607.09.21 | 광해 1년 | 부응교(副應敎) |
1608.12.26 | 광해 2년 | 직제학(直提學) |
1609.06.23 | 광해 3년 | 광주목사(廣州牧使) |
1612.03.12 | 광해 4년 | 파직 광주목사(廣州牧使) 파직 |
1613.06.21 | 광해 5년 | 파직 장단 부사(長湍府使)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은 즉 연안 부사(延安府使)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인데 김래와 혼인하였습니다. 역적을 토벌하는 이때를 당하여 아직까지 관작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너나없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모두 파직하라 명하소서.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는 김제남의 둘째 아들 김규(金珪)의 처 아비입니다. 역적의 괴수와 혼인한 집인데 아직도 관작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
1615.08.13 | 광해 7년 | 삭탈 관작 사과(司果)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공성 왕후(恭聖王后)의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謝恩箋文)에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 ‘삼가 허물을 보면 어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데 관계된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허물을 보면’이라는 뜻의 ‘관과(觀過)’ 두 자는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김상헌은 기롱하고 풍자하는 말을 감히 사은 전문에다 써넣었으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긴 정상이 몹시 통분스럽습니다. 전에 이민성(李民宬)이 지은 것에도 성풍(成風)에 비교한 말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적발하여 치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징계되지 않아 일종의 사론(邪論)이 잇달아 일어나게 된 것이니 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상헌과 이민성 등을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
1624.01.25 | 인조 2년 | 기복(起復) 상이 김상헌(金尙憲)·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구굉(具宏) 등을 기복(起復)시키기를 명하니 김상헌이 상소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겠다고 굳이 사양하였다. 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를 기복시키도록 명하니 서경주가 상소하여 상제를 마치겠다고 청하고 신익성도 상소하여 기복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면서 담복(禫服)으로 종군(從軍)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
1624.08.28 | 인조 2년 | 대사간(大司諫) |
1624.11.12 | 인조 2년 | 예조참의(禮曹叅議) |
1624.11.20 | 인조 2년 | 이조참의(吏曹佐郞) |
1625.04.09 | 인조 3년 | 도승지(都承旨) |
1625.07.29 | 인조 3년 | 병조참판(兵曹叅判) |
1625.08.07 | 인조 3년 | 대사헌(大司憲) |
1625.10.16 | 인조 3년 | 부제학(副提學) |
1626.04.28 | 인조 4년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1626.06.10 | 인조 4년 | 지경연사(知經筵事) |
1626.06.10 | 인조 4년 |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
1627.05.16 | 인조 5년 | 대사간(大司諫) |
1627.07.05 | 인조 5년 | 도승지(都承旨) |
1627.09.12 | 인조 5년 | 부제학(副提學) |
1627.10.22 | 인조 5년 | 좌부빈객(左副賓客) |
1627.10.24 | 인조 5년 | 부사직(副司直) |
1627.12.04 | 인조 5년 |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
1628.01.05 | 인조 6년 | 대사간(大司諫) |
1628.06.11 | 인조 6년 | 도승지(都承旨) |
1628.06.13 | 인조 6년 | 자헌대부(資憲大夫) |
1628.07.26 | 인조 6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628.11.16 | 인조 6년 | 대사헌(大司憲) |
1629.02.13 | 인조 7년 | 제학(提學) |
1630.05.17 | 인조 8년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1630.12.08 | 인조 8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631.05.13 | 인조 9년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1631.11.30 | 인조 9년 | 도승지(都承旨) |
1632.04.25 | 인조 10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633.05.22 | 인조 11년 | 함경감사(咸慶監司) |
1635.06.07 | 인조 13년 | 대사성(大司成) |
1636.01.12 | 인조 14년 | 공조판서(工曹判書) |
1636.01.28 | 인조 14년 | 대제학(大提學) |
1636.03.07 | 인조 14년 | 국방책에 관한 상소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차자를 올리기를 화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병란이 일어나는 것은 비록 분명히 언제라고 알 수는 없으나 또한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종사의 안위를 안주(安州) 한 성의 승부에다만 걸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도적이 해서(海西)로 넘어 들어 온다면 일은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원수는 자모성(慈母城)을 부원수는 철옹성(鐵甕城)을 본도 병사는 안주성(安州城)을 진압하게 하고 관서(關西)를 셋으로 나누어 세 진(鎭)에 소속시킨 다음 정예한 속읍의 군민과 용감한 무사를 선출하여 무양(撫養)하고 훈련시켜 때로 번갈아 교대해서 스스로 지키게 하면 반드시 큰 이익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군사의 수가 적고 힘이 약하여 오랫동안 대적(大敵)을 막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유사시에는 황해도의 군사로 자모성을 구제하고 함경남도의 군사로 안주성을 구제하고 함경북도의 군사로 철옹성을 구제하게 하되 안주성이 공격을 받을 때는 자모성과 철옹성이 함께 구제하게 하고 철옹성이 공격을 받을 때에는 안주성과 자모성이 또한 그렇게 하도록 하소서. 또 대신과 중신(重臣) 중에 충성스럽고 위망이 있는 자를 가려 평양에 보내어 3진을 통어하게 하되 먼 곳에서 꼭 일마다 제어하지 말고 전쟁에 나아가 우물쭈물 동요하여 군율을 잃는 자가 있으면 왕명을 청하여 군법을 시행하게 하소서. 또 삼남(三南)·관동(關東)·기내(畿內)의 군사를 뽑아서 무기를 정비하게 하고 급할 때 즉시 불러서 숙위(宿衛)에 보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3진에 소속된 요해처 수령을 간혹 주장(主將)에 천거하여 보고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깊이 가상하게 여겼다. 차자에 진달한 일은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
1636.05.25 | 인조 14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636.06.08 | 인조 14년 | 청백리(淸白吏) |
1636.07.02 | 인조 14년 | 숭정대부(崇政大夫) |
1636.07.02 | 인조 14년 |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
1636.07.02 | 인조 14년 |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
1636.12.27 | 인조 14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636.12.30 | 인조 14년 | 사신 문제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재신을 오랑캐 진영에 보내려 한다고 하는데 가령 오랑캐가 우리의 뜻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며칠 전 소와 술을 저들이 이미 받지 않았는데다가 어제의 일을 바야흐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것이니 지금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안의 사람들과 근왕병이 많이들 풀이 죽어 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사태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저들이 사람을 보내 오기를 기다려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좋지만 세시(歲時)에 존문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다. 하였다. 아뢰기를 세시의 예는 우리가 이미 행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시라는 말은 지난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내일 사람을 보내도 명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하였다. |
1637.01.18 | 인조 15년 |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논하다 대신이 문서(文書)를 품정(稟定)하였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문서를 제술(製述)한 사람도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상이 문서 열람을 마치고 최명길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온당하지 않은 곳을 감정(勘定)하게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군부(君父)를 모시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토록 위급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에 누가 다른 의논을 내겠습니까. 다만 이 일은 바로 국가의 막중한 조치인데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 및 2품 이상을 불러 분명하게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마음은 성실성이 부족하여 속 마음과 말이 다르다. 나랏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니 이 점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설령 다른 의논이 있더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아뢰기를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君臣)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군신(羣臣)이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이 이성(二聖)이 마침내 겹겹이 포위된 곳에서 빠져나오게만 된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사죄(死罪)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상이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실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뿐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기 짝이 없지만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나 한번 허락한 뒤에는 모두 저들이 조종하게 될테니 아무리 성에서 나가려 하지 않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 무제(晋武帝)나 송 태조(宋太祖)도 제국(諸國)을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마침내는 사로잡거나 멸망시켰는데 정강(靖康)의 일010) 에 이르러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의 제신(諸臣)들도 나가서 금(金)나라의 왕을 보면 생령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지만 급기야 사막(沙漠)에 잡혀가게 되자 변경(汴京)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김상헌의 말 뜻이 간절하고 측은하였으며 말하면서 눈물이 줄을 이었으므로 입시한 제신들로서 울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상의 곁에 있으면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 【 이 밑에 폐하(陛下)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제신이 간쟁하여 지웠다.】 삼가 명지(明旨)를 받들건대 거듭 유시해 주셨으니 간절히 책망하신 것은 바로 지극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서 추상과 같이 엄한 말 속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기운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국이 위덕(威德)을 멀리 가해 주시니 여러 번국(藩國)이 사례해야 마땅하고 천명과 인심이 돌아갔으니 크나큰 명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文書)와 예절(禮節)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이 저절로 있으니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반드시 죽고자 하여 자결하려 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방의 진정한 소원이 이미 위에서 진달한 것과 같고 보면 이는 변명도 궁하게 된 것이고 경계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소방이 어찌 온전히 살려주고 관대하게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용서하실 것이기에 감히 실정을 토로하며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
1637.01.28 | 인조 15년 | 정온과 김상헌의 자결시도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
1637.07.29 | 인조 15년 | 김상헌의 죄에 대해 논하다 장령 박계영(朴啓榮)과 유석(柳碩)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간에 도망할 곳이 없으니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에 유독 다를 리가 없습니다. 어찌 운수의 성쇠(盛衰)와 자신의 이해(利害)로서 그 마음을 달리하겠습니까. 전 판서 김상헌은 한때의 이름난 신하로서 성상께 인정을 받아 정치에 참여한 지 10년 동안 가장 많은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사랑이 깊고 의리가 막중한데 어찌 차마 전하를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에 버린단 말입니까. 남한 산성에서 굴복하던 날 임금은 헤아리지 못할 위험에 빠졌고 신민은 망극한 심정이 모두 같았으니 자신을 우선하고 임금을 뒤로 하는 것은 의리상 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상헌이 이미 정온(鄭蘊)처럼 칼로 할복하지 못하였다면 화복(禍福)을 시종 전하와 함께 해야 하는데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애당초 염려하지 않았고 당시의 일이 대충 안정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곳에서 쉬며 왕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위하기를 몸을 깨끗이 하고 절의를 지키며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론(異論)을 고취시켜 국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켰으니 아 신하의 의리가 이에 이르러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명예를 구하느라 임금을 팔아먹고 붕당을 세워 국가를 그르친 것이 다만 상헌의 여사(餘事)일 뿐입니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부도덕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극변으로 위리 안치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상헌의 논죄가 너무 늦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그 후 이도장(李道長)이 이어서 상헌과 정온을 아울러 논죄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 신하는 평생 정도(正道)로 행하였는데 조정이 뜻을 굽힌 조치는 이미 두 신하의 마음을 어긴 것이니 두 신하가 어떻게 떠나가지 않겠는가. 천지의 위치가 뒤바뀌는 날을 당하여 두 신하는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절의를 고치지 않았으니 그 의리는 충분히 인륜을 선양했다 하겠다. 유(柳)·목(睦)처럼 사사로운 분노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면 실로 논할 것이 못 된다. 그런데 혹 두 신하의 출처(出處)를 의심하는 자가 또 있으니 인심의 흉악함이 이와 같도다. . |
1638.08.01 | 인조 16년 | 김상헌의 죄에 대해 논하다 지평 이해창(李海昌)이 아뢰기를 전 판서 김상헌의 청렴과 정직은 사류(士類)가 추앙하는 바이고 성상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남한 산성에서 굴복하던 때를 당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변치 않은 자는 김상헌과 정온입니다. 두 사람의 정상은 실로 똑같은데 만약 칼로 찔렀느냐 찌르지 않았느냐로 한 사람은 죄주고 한 사람은 죄주지 않는다면 매우 근거 없는 의리입니다. 또 10년간 대우를 받은 것은 정온도 마찬가지고 끝내 임금을 찾아와 뵙지 않은 것은 정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사수(死守)의 의논을 이룩하지 못하고 또 결사(決死)의 의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죄를 지은 것으로 자처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초야에서 죽기를 기약한 것입니다. 유석(柳碩) 등이 비슷한 말로 얽어매어 시기를 틈타 모함하는 계책을 삼았으니 아 또한 참혹합니다. 장령 유석과 박계영을 사판에서 삭제하고 영원히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처럼 전에 없었던 괴상 망측한 변론을 정원은 어찌하여 올렸는가. 여러 승지들의 한 바가 또한 매우 괴이하다. 이 계사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
1639.12.04 | 인조 17년 | 호군(護軍) |
1639.12.26 | 인조 17년 | 청나라에 대응하는 것에 대해 논하다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기를 신은 뼈에 사무치는 비방을 받고 거친 외방에 버려짐을 달게 여기고 있었는데 삼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은혜를 받아 죄를 면해주시고 직첩(職牒)이 또 돌아왔으나 죽을 때까지 초야에서 칩거할 마음으로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늙고 병든 이 목숨은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방법이 없어 오직 밤낮으로 감격하며 눈물을 흘릴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상후(上候)가 불편하시어 오래도록 회복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신하된 자의 마음에 근심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본래 의술(醫術)에 어두워 정성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또 떠도는 소문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에 따라 장차 5천 명의 군병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고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의심하는 마음이 정해지지 못한 채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군주에 대하여 따를 수 있는 일이 있고 따를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에게서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따르지 않을 바가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당초 국가의 형세가 약하고 힘이 다하여 우선 눈앞의 보존만을 도모하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나 지금은 전하께서 난을 평정하고 바르게 되돌리려는 큰뜻을 가지고 와신 상담해 오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가면 갈수록 미약해져서 일마다 순순히 따라 끝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오늘날 계획하는 자들이 예의(禮義)는 족히 지킬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신은 예의로써 분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지고 논한다 하더라도 강포한 이웃의 일시적인 사나움만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원대한 계책이 못 됩니다. 정축년 이후로 중조(中朝)의 사람들이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데 특별히 용서해 주고 있는 까닭은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하여 패배하였고 우리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군병들과 해상 누선(樓船)의 병졸들이 오랑캐를 쓸어내고 옛 강토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잘못을 금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051) 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문책하는 군대가 벽력같이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면 곧바로 해서(海西)와 기도(畿島) 사이에 당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두려움이 심양에만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 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 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단연코 다시 도모하고 서둘러 대계(大計)를 정하시며 강포함에 뜻을 뺏기지 말고 사특한 얘기에 두려움을 갖지 마시어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신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 되었습니다. 비록 폐하여 물러나 있는 중이나 이 국가의 막대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번 유림(柳琳)이 갈 적에는 신이 원방에 있었고 일도 급박하여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여한이 뼈에 사무쳐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정성을 진달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처럼 전에 없었던 괴상 망측한 변론을 정원은 어찌하여 올렸는가. 여러 승지들의 한 바가 또한 매우 괴이하다. 이 계사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
1640.12.06 | 인조 18년 | 안동에서 서울 도착 김상헌이 오늘 서울에 도착하였기에 빈신에게 이문하여 저들에게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
1640.12.08 | 인조 18년 | 위로 하다 김상헌이 안동에서 길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 위로하고 초구(貂裘) 1벌 백금 5백 냥 및 기타 다른 물건도 이에 맞도록 하사하였다. 조한영(曺漢英)과 채이항(蔡以恒)도 북쪽으로 떠나려 할 때 한영에게는 백금 3백 냥 이항에게는 1백 5십 냥을 하사하고 기타 다른 물건도 차등 있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
1640.12.08 | 인조 18년 | 편의 제공 비국이 아뢰기를 김상헌이 이제 떠나려 하는데 노병으로 죽어가니 무사히 도착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자제 1인을 대동하고 가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심양에 들어간 뒤에 형편에 따라 주선해야 할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니 관향 은화(管餉銀貨)를 하사하여 가엾게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은화는 이미 해조로 하여금 계산해서 지급하도록 하였다. 하고 또 명하여 수행하는 그의 자제에게 말을 지급하게 하고 각읍으로 하여금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
1640.12.09 | 인조 18년 | 하직 상소 김상헌이 떠나면서 상소하기를 신은 말은 조금도 도움됨이 없이 몸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국문(國門)을 지나 궁궐과 멀어지니 근심스런 마음에 사모하는 생각만 더해갑니다. 뜻밖에 성상께서 하찮은 저의 정상을 곡진히 살피시어 내사(內使)를 시켜 간절하신 말씀으로 안부를 물어주셨습니다. 보배스런 초구를 입으니 따뜻한 기운에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조정에 나아가 다시 용안을 뵈옵게 된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하더라도 사는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성상께로 향하는 피눈물 어린 충정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비통스럽다. 경은 모쪼록 잘 대답하여 지극한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선전관 1인을 보내 호송하게 하니 도성의 백성이 모두 통곡하였다. |
1640.12.19 | 인조 18년 | 의주에서 용골대를 만나다 김상헌이 의주에 도착하자 용골대가 영상 이하 여러 재신과 사은사 일행을 관(館)에다 모아놓고 불러 들이게 하였다. 상헌이 베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와 절을 하지 않고 이현영(李顯英)의 우측에 의지해 누워있었다. 청차(淸差) 3인이 한참 동안 서로 의논한 뒤에 묻기를 우리들이 들은 바가 있으니 모두 말하라. 하니 상헌이 답하기를 묻는 말이 있으면 내 의당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단서를 말하지 않고서 말하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정축년의 난에 국왕이 성을 나왔는데도 유독 청국을 섬길 수가 없다 하였고 또 임금을 따라 성을 나오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내 어찌 우리 임금을 따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노병으로 따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정축년 이후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는데도 받지 않고 고신(告身)을 반납한 것은 무슨 의도였는가? 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노병 중이라 하여 직에 제수한 적이 없는데 무슨 관직을 제배하여 받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허탄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또 묻기를 주사를 징발할 적에 어찌하여 저지하였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내 뜻을 지키고 내가 나의 임금에게 고하였는데 국가에서 충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굳이 듣고자 하는가? 하니 용호가 급히 말하기를 어찌해서 다른 나라라고 하는가? 하자 말하기를 피차 두 나라는 각기 경계가 있는데 어찌 다른 나라라고 할 수 없는가? 하였다. 세 호인이 서로 쳐다보면서 말이 없다가 즉시 나가도록 하였다. 나간 뒤에 오목도(梧木道)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우물쭈물 말하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였는데 여러 호인이 둘러서서 보고 감탄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김상헌 판서와 신득연 승지는 심양으로 들여가야겠다. 차사원을 시켜 압송해 오라. 빈객 보덕은 우리와 내일 강을 건너야 한다. 하였다. |
1645.02.23 | 인조 23년 | 귀환 전전 영의정 최명길(崔鳴吉)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전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서 돌아왔다. |
1646.03.27 | 인조 24년 | 좌의정(左議政) |
1646.06.19 | 인조 24년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1648.06.14 | 인조 24년 | 34번째 사직 상소 34번째 사직 상소 긑에 사직하고 양주로 돌아가다 |
1649.08.04 | 효종 즉위년 | 좌의정(左議政) |
1652.06.25 | 효종 3년 | 시호(諡號) 문정(文正) 勤學好問(근학호문) 以正服之(이정복지)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 함이 정이다. |
1652.06.25 | 효종 3년 | 졸기(卒記)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죽음에 임해서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로 여러 조정에서 다행히도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는데도 작은 공효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 정축년 난리 이후로는 벼슬에 뜻을 끊었는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갖추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先王)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태사(台司)에다 두시기에, 은명에 감격하여 힘든 몸을 이끌고 한번 나아갔으나, 흔단만 쌓은 여생이 힘을 다할 희망이 없어,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에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아 노쇠한 몸이 보답할 길이 없기에, 다만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의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코자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하고 외로이 성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이 점점 깊이 고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거듭 천안(天顔)을 뵙기에는 이 인생 이제 희망이 없으니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며 점점 죽어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으시던 때의 뜻을 더욱 가다듬으시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바꾸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시고 실제적인 덕업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마련하시면 신이 비록 죽어 지하에 있더라도 거의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남겨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말이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매우 가상하다.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 하였다.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무함하여 욕하자 이에 진계하여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진계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출성(出城)의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상을 보고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상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칸 초옥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개탄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풍악문답(豊岳問答)》을 지었는데, 그 글에,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하였다. 상소하여 산성(山城)의 상자(賞資)를 사양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은 머리를 뽑으며 죄를 청한 글에서 【항복하는 글.】 마음이 떨어졌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즈음에 천성을 잃었습니다. 형체는 있으나 정신은 죽어 토목과 같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산성에 계실 때에 대신과 집정자들이 출성(出城)을 다투어 권했는데도 신은 감히 죽음으로 지켜야 된다고 탑전에서 망령되이 아뢰었으니 신의 죄가 하나요, 항복하는 글이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초고를 손으로 찢어버리고 묘당에서 통곡했으니 신의 죄가 둘이요, 양궁(兩宮)이 몸소 적의 진영으로 갈 때에 신은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지도 못하였고 병이 들어 따라가지도 못했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지고도 아직 형장(刑章)을 면하고 있으니 어찌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수행한 자들과 더불어 감히 은수를 균등히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삼가 듣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으면 가죽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고 적국이 없어지지 않으면 전쟁과 수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와신상담하는 뜻을 가다듬으시고 보장(保障)의 땅을 증수하시어, 국가로 하여금 다시 욕을 당하는 일을 면케 하소서. 아, 한때의 강요에 의했던 맹약을 믿지 마시고 전일의 큰 덕을 잊지 마소서. 범이나 이리같은 나라의 인자함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와 같은 나라를 가벼이 끊지 마소서. 누가 이것으로써 전하를 위해 간절히 진계하겠습니까. 대저 천리 강토로 원수의 부림을 받는 일은 고금에 부끄러운 바입니다. 매양 선왕(先王)의 주문(奏文)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음을 생각하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하였다. 그 뒤 유석(柳碩)·이도장(李道長)·이계(李烓) 등이, 임금을 버렸다는 것으로 논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삭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청인(淸人)이 장차 우리 군대로 서쪽 명나라를 치려 했는데, 김상헌이 글을 올려 의리로 보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극언하였다. 그 상소에, \"근래 거리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조정에서 북사(北使)의 말을 따라 장차 군대 오천 명을 발동하여 심양(瀋陽)을 도와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 합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과 의혹스러움이 진정되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저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따를 만한 일도 있고 따라서는 안 될 일도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가 비록 계씨(季氏)에게 신하 노릇을 하였으나,, 공자(孔子)는 오히려 그들도 따르지 않을 바가 있음을 칭찬했습니다. 당초 국가가 형세가 약하고 힘이 모자라 우선 목전의 위급한 상황을 넘길 계책을 했던 것인데, 난을 평정하고 바름으로 돌이키신 전하의 큰 뜻으로 와신상담한 것이 이제 3년이 흘러, 치욕을 풀고 원수를 갚는 일을 거의 손꼽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갈수록 더욱 희미해져서 일마다 굽혀 따라 결국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죽는 것과 망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있지만 반역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께 아뢰기를 ‘원수를 도와 부모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전하께서는 필시 유사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말을 잘 꾸며 스스로를 해명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필시 왕법으로 처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오늘날 일을 계획하는 자들은, 예의는 지킬 것이 없다고 합니다만, 신이 예의에 근거하여 변론할 겨를도 없이, 비록 이해만으로 논해 보더라도, 강한 이웃의 일시의 포악함을 두려워하고 천자(天子)의 육사(六師)의 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정축년 이후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루도 우리 나라를 잊지 않고, 그 구제하지 못하고 패하여 융적(戎賊)에게 절한 것이 본심이 아니었음을 특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하(關下) 열둔(列屯)의 병사들과 바다 배 위의 수졸들이 비록 가죽 털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오랑캐를 소탕하여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우리 나라가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에는 넉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 호랑이 앞에서 창귀(倀鬼) 노릇을 한다는 것을 들으면 죄를 묻는 군대가 우레나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바람을 타고 하루만에 해서(海西) 기도(圻島) 사이에 곧바로 도달할 것이니, 두려워할 만한 것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하지 마소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 대의가 매우 중하니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대의를 저버리고 끝내 위망을 면치 못할 바엔 바른 것을 지켜서 하늘에 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는 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순리를 따르면 민심이 기뻐하고 민심이 기뻐하면 근본이 단단해집니다. 이것으로 나라를 지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께서 거의(擧義)하여 회군(回軍)을 하시어 이백 년 공고한 기반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 임진년에 구해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거조를 한다면, 비록 천하 후세의 의논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뵐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즉시 생각을 바꾸시고 큰 계책을 속히 정하시어 강한 이웃에게 빼앗기는 바 되지 마시고 사악한 의논을 두려워 마시어, 태조와 선조의 뜻을 이으시고 충신과 의사의 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흉인(兇人)이 유언 비어로 청인에게 모함하여, 구속되어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길이 서울을 지나게 되자 상이 특별히 초구(貂裘)를 내려 위로하였다. 심양에 이르러 청인이 심하게 힐문하니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키는 것은 나의 뜻이고 내가 고하는 분은 내 임금뿐이다. 물어도 소용없다.\" 하니, 청인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차고 말하기를,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정말 어려운 늙은이다.\" 하였다. 오랜 뒤 비로소 만상(灣上)으로 나왔는데, 그 뒤 신득연(申得淵)·이계(李烓)의 무함을 받아 또 심양에 잡혀가 있게 되었다.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말년에 좌상에 발탁되었는데, 와서 사례하고 바로 돌아갔다. 상이 즉위하여 큰 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청인이 잘못된 논의를 하는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다고 책망을 하여, 상헌이 드디어 속 시원히 벼슬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끝내 그 뜻을 펴보지 못했으므로 조야가 애석히 여겼다. 그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했다. 《청음집(淸陰集)》이 있어 세상에 행한다. 일찍이 광명(壙銘)을 지었는데, 그 명에, 지성은 금석에 맹서했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년 뒤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 것이네 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1661.04.24 | 현종 2년 | 부조지전(不祧之典) 효종 묘정에 배향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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