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현감(德山縣監)  수민(壽民) |
1623년(인조 1)∼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요수(堯叟) 호는 사포(沙浦). 증조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낸 김극효(金克孝)이고 조부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김상용(金尙容)이며 부친은 참판(參判)을 지낸 김광현(金光炫)이다. 어릴 적에 박사(博士)의 업을 닦고 전주(篆籒)를 익혔다. 당시의 많은 당안가액(堂顔家額)이 그의 손을 거쳤다. 효종의 명을 받아 각체(各體)를 서진(書進)하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에 덕산현감(德山縣監)이 되었다. 평생 남과 교유하기를 즐기지 않았고 물욕이 없어서 고향에 1무(畝)의 땅도 증식시키지 않았고 서울에 집 한 채도 없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함에 수창(手瘡)을 얻어 사망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의(行義)가 널리 알려져 1674년(현종 15)에 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워주도록 하였다. 아들인 김성적(金盛迪)은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냈다. 묘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