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領議政)  수흥(壽興) |
김수흥(金壽興)은 부(父) 김광찬(金光燦)과 모(母) 연안김씨(延安金氏) 사이에서 3남 5녀 중 둘재아들로 1626년 태어났다. 원래 김광찬(金光燦)은 김상관(金尙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김상헌(金尙憲)에게 입양되었으며 김상관의 장남 김광혁(金光爀)이 후손이 없자 김수흥(金壽興)이 본가로 다시 입양되었다. 어머니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조부는 인목대비의 친정 부친인 김제남(金悌男)이고 부는 김래(金琜)이다. 즉 인목대비가 고모이다.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광혁(金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김존경(金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 해 문과중시에 역시 병과로 급제한 뒤 부교리·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성·대사간·경기도관찰사·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에 호조판서 1670년(헌종 11년)에 한성부판윤 강화유수 1673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우의정이 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될 뻔하였고 그 해 8월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 해 배소에서 죽었다. 김수흥은 송시열(宋時烈)을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하여 그의 뜻에 따랐고 『주자대전(朱子大全)』·『어류(語類)』 등을 탐독하였다. 역대의 왕에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하기를 힘쓰고 정치의 혁신을 여러 번 건의했다. 저서로는 『퇴우당집(退憂堂集)』 5책이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김수흥묘(金壽興)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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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흥후세불망비(金壽興後世不忘碑)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내 | ||
퇴우당유적비(退憂堂遺跡碑)포항시 남구 장기면 마현리 | ||
퇴우당집(退憂堂集)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수흥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10년에 간행한 시문집. |
1648.. | 인조 26년 | 진사(進士)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5위(5/100) |
1655.. | 효종 6년 | 문과(文科) 효종(孝宗) 6년(1655) 을미(乙未)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2위(04/07) |
1655.01.25 | 효종 6년 | 태학생 김수흥 등이 상소하여 문묘의 축사에 오랑캐의 연호를 쓰지 말 것을 청하다 태학생 김수흥(金壽興) 등이 상소하기를 "성균관에 제사지내어 공경을 보이는 것은 국가의 큰일입니다. 밝고 바른 임금들은 누구나 다 삼가기를 다하여 변두(邊豆)의 수와 오르내리는 절차일지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대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공경하는 것을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 예(禮)에 어그러지는 글이 의리를 크게 해친다면 어찌 공경을 보이는 데에만 부족하겠습니까. 신명이 오는 것도 반드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문묘(文廟)의 축사(祝辭)에도 저 나라의 연호를 쓴다 하니 신들은 분개하여 못 견디겠습니다. 아아 국가가 불행한 지 오래 되었거니와 위기가 날로 일어나고 시끄러운 말이 그치지 않으니 맹자(孟子)의 하늘을 두려워하라는 가르침은 본디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고 《춘추》의 대의(大義)는 부자(夫子)가 일찍이 근엄하게 한 바인데 한때의 방편을 어찌 빈조(蘋藻)의 제향(祭享)에서도 아울러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거란(契丹)이 묘악(廟樂)을 보겠다고 청하는 것도 손면(孫沔)이 오히려 물리쳤는데 더구나 축사(祝史)가 경건히 고할 때에 그 연호를 칭한다면 오르내리는 우리 부자의 신명이 어찌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겠습니까. 병자년·정축년 이후로 종묘(宗廟)의 제향에 이 연호를 통용한 적이 없으므로 신들은 근년 이래에도 이 전례에 따라 행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석채(釋菜) 날에 비로소 이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장서 유생들을 거느리고 복합(伏閤)하여 개정하기를 청해야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마는 소문을 번거롭힐 듯하므로 약간의 재중(齋中)의 유사(有司)와 함께 첩황(貼黃) 의 규례를 외람되게 썼으니 신들의 뜻이 또한 슬픕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
1656.. | 효종 7년 | 문과(文科) 효종(孝宗) 7년(1656) 병신(丙申) 중시(重試) 병과(丙科) 3위(06/08) |
1656.05.28 | 효종 7년 | 설서(說書) |
1656.10.13 | 효종 7년 | 주서(注書) |
1657.08.06 | 효종 8년 | 좌부승지(左副承旨) |
1658.01.09 | 효종 9년 | 수찬(修撰) |
1658.05.27 | 효종 9년 | 지제교(知製敎) |
1658.10.22 | 효종 9년 | 병조정랑(兵曹正郞) |
1659.01.19 | 효종 10년 | 이조좌랑(吏曹佐郞) |
1659.12.09 | 현종 원년 | 이조정랑(吏曹正郞) |
1661.01.25 | 현종 2년 | 응교(應敎) |
1663.04.11 | 현종 4년 | 대사간(大司諫) |
1663.10.03 | 현종 4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663.11.24 | 현종 4년 | 우부승지(右副承旨) |
1663.11.29 | 현종 4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664.05.22 | 현종 5년 | 병조참의(兵曹參議) |
1664.06.01 | 현종 5년 | 우부승지(右副承旨) |
1664.07.27 | 현종 5년 | 대사성(大司成) |
1664.12.25 | 현종 5년 | 경기감사(京畿監司) |
1666.01.07 | 현종 7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666.08.15 | 현종 7년 | 호조판서(戶曹判書) |
1669.01.04 | 현종 10년 | 광주부윤(廣州府尹) |
1670.05.17 | 현종 11년 | 한성판윤(漢城判尹) |
1670.09.06 | 현종 11년 | 강화유수(江華留守) |
1673.04.24 | 현종 14년 | 우의정(右議政) |
1674.05.15 | 현종 15년 | 영의정(領議政) |
1674.07.15 | 현종 15년 | 판부사 김수항 등이 대죄하다 판부사 김수항 영의정 김수흥 행 호조 판서 민유중 병조 판서 김만기 이조 판서 홍처량 행 대사헌 강백년 형조 판서 이은상 예조 참판 이준구 참의 이규령 응교 최후상 헌납 홍만종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망령되게 예의 제도를 논하였다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러한 분부를 받고 나니 매우 황공하고 놀라워서 짚자리에 엎드려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형관에게 회부하여 나라의 법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1674.07.16 | 현종 15년 |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에 부처하다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에다 부처(付處)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대신의 직책은 문서만 받들어 이행하는 데 있지 않고 큰 일에 임하여 뜻을 변하지 않아야만 임금을 보필하여 국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의정 김수흥은 오늘날 상복 제도에 대해 모여 의논할 때에 처음 올린 계사엔 종이에 가득히 알쏭달쏭한 얘기만 늘어놓고 종내 뚜렷한 결론이 없었고 두 번째 올린 계사는 인용하지 않아야 할 고례를 인용하여 범연히 회계하였고 세 번째 올린 계사는 국가 전례에 있는 몇 마디 말만 써서 책임을 메꾸는 형식으로 대답하였고 네 번째 계사는 감히 버릇없고 당치 않은 말로 정체가 아니다는 글을 새로 인용하였으니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 중도에 부처하라." |
1674.08.23 | 숙종 원년 | 대간이 아뢴 전 영의정 김수흥 등의 부처를 중지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전일에 아뢴 ‘전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중도 부처(中道付處) 하라는 명령과 전 장령(掌令) 이광적(李光迪)과 전 지평(持平) 유지발(柳之發)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는 명령과 전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을 절도 원찬(絶島遠竄)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 시키는 일’은 모두 정지시켰다. |
1674.10.10 | 숙종 원년 | 사위할 때 반사가 있었으나 남이성은 그대로 유배되고 김수흥은 사면되다 이보다 앞서 남이성(南二星)이 간장(諫長) 으로서 일을 말하였다가 진도(珍島)로 귀양가고 김수흥(金壽興)은 빈청에서 의례한 일로 춘천(春川)으로 귀양갔는데 사위(嗣位)할 적에 반사(頒赦)하였으나 남이성은 그대로 유배되었고 김수흥은 사면되었다. |
1726.04.13 | 영조 2년 | 시호(諡號) 문익(文翼) 忠信接禮(충신접례) 思慮深遠(사려심원)충성스럽고 미더우며 예로써 손님을 접대함이 문이요 생각이깊고 원대함이 익이다.1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