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인(女流詩人)  호연재(浩然齋)


호연재(浩然齋)는 선원 김상용의 증손자인 김성달(金盛達)과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옥재(李玉齋)와의 사이에서 6남 7녀중 넷째딸로 1681년에 태어났다.

호연재는 문인이신 부모와 모두 문인인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학문을 익히고 시문을 익히면서 성장하였다. 원래 충남 홍성 오두리에 살았으나 김성달이 한성부 판관을 지낼때 청풍계 태고정에서 살았다.

호연재 김씨는 19세에 대전 대덕구 회덕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 가문의 며느리로 1699년(숙종 25년) 소대헌 송요화(宋姚華)와 결혼해서 보은현감을 지낸 아들 송익흠(宋益欽)과 그리고 청풍김씨 김치공(金致恭)에게 시집간 딸 하나를 두었다. 회덕 송촌동 동춘당 인근 시댁에서 관직을 따라 외지로 간 남편을 대신하여 동춘당 가문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자녀 양육에 힘쓰면서 후손들에게 학문과 詩도 가르치는 등 훌륭한 규방여인으로 42세 생을 살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그녀의 호는 맹자의 ‘공손추’ 편에 나오는 “천지간에 가득하고 넓은 기운이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따와서 호연재(浩然齋)라 지었고 벼슬길로 외지로 다니는 남편을 대신 가장으로 용기 있고 담대한 여성으로 40여 명의 가솔들을 위해 가난한 시집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나갔다 전해온다.

호연재 김씨는 학문이 깊어 조카들의 학문을 지도하고 시를 가르치는 등 조카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카 송명흠(宋明欽)은 호연재 김씨의 성격에 대해 “수려한 용기와 함께 담소에 일찍이 마음속으로 감탄하였고 경서와 사서를 탐구하고 강론하며 평론하시는 등 학문이 깊었다. 우리 형제들이 숙모님을 우러러 보았다”고 그녀의 품성을 평하였다.

그러나 호연재는 시댁의 냉대와 남편의 무관심으로 인한 외로움에 늘 친정집과 형제들을 그리워 하였고 이런한 그녀의 심리가 그녀의 시에 고스란히 묻어 나오며 호방한 성품으로 술과 담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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