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목사(坡州牧使)  광찬(光燦) |
김광찬(金光燦 1597년 ~ 1668년 2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회(思晦) 호는 운수거사(雲水居士)이다. 서예가로 청풍군수 공조참의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 생부는 장단부사 김상관이다.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형제 정승 김수흥·문곡 김수항의 아버지이며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또한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6대조이다. 인목대비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김광찬은 본래 장단부사 증좌찬성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할아버지 도정 김극효(金克孝)에 의해 삼촌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김제남의 아들인 김내(金琜)의 딸 연안김씨와 결혼하였다. 김제남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로 그는 인목대비의 조카사위가 되기도 한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인조 반정 후 시험에 응시 1627년(인조5)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진사시에도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음보로 관직에 진출하여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낭청(刑曹郎廳)을 지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1637년 아버지 김상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자결을 기도하였을 때 만류하지 않아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을 거친 뒤 강화도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냈고 아버지 김상헌과 세자 등이 청나라에 인질로 갈 때 함께 갔다가 1645년 2월 귀국하였다. 귀국 길에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에 임명되어 귀국했다. 1651년 중추부첨지를 거쳐 교하현감(交河縣監)에 부임하였다. 1652년 아버지 김상헌의 3년상을 당하였고 1655년 3년상을 마친 뒤 56년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가 되었다. 현종 즉위 후 아들 김수흥·김수항 형제가 출세하자 1661년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뒤에 청풍군수(淸風郡守)로 부임하였고 파주목사(坡州牧使)를 거쳐 아들 김수흥·김수항 형제가 6판서와 좌우찬성 등을 지냈으므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사후 아들 김수흥·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부친의 영향으로 동기창체(董其昌體)에도 조예가 깊었다. 묘소는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있다. 1668년 2월 24일에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은 72세였고 그해 4월 양주군 석실산(石室山) 양아버지 김상헌 묘소의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비명과 행장은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썼다. |
김광찬묘(金光燦)암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 |
1627.. | 인조 5년 | 생원(生員)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2위 |
1629.03.18 | 인조 7년 |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
1630.03.26 | 인조 8년 | 시직(侍直) |
1633.06.22 | 인조 11년 | 공조좌랑(工曹佐郞) |
1635.11.24 | 인조 13년 | 통훈대부(通訓大夫) |
1635.11.24 | 인조 13년 | 형조정랑(刑曹正郞) |
1645.07.19 | 인조 23년 |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
1645.08.02 | 인조 23년 | 면천군수(沔川郡守) |
1645.08.25 | 인조 23년 | 한성판관(漢城判官) |
1646.03.04 | 인조 24년 | 통진현감(通津縣監) |
1648.10.05 | 인조 26년 | 통정대부(通政大夫) |
1651.08.17 | 효종 2년 | 교하현감(交河縣監) |
1655.04.29 | 효종 6년 | 청풍군수(淸風郡守) |
1658.06.11 | 효종 9년 | 파주목사(坡州牧使) |
1661.05.11 | 현종 2년 | 공조참의(工曹叅議) |
1668.02.24 | 현종 9년 | 졸기(卒記) 김수흥의 아비 김광찬(金光燦)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이다. 【생부(生父)는 바로 김상헌의 형인 부사(府使) 김상관(金尙寬)이다.】 어려서 글을 읽어 태학생(太學生)이 되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의가 되었다. 장수한 자로서 관질을 높여 주어 동지중추부사에 제배되었으며 이 때에 이르러 나이 72세로 졸하였다. 이 당시에 수흥과 수항이 재지와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명재상이 되었으며 두 사위도 명로(名路)에 있어서 자손들의 영달과 번창함이 세상에 드문 바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복이 많다고들 하였다. |